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
대하 22: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면서 세 치 혀는 항상 앞서기 마련이어서, 누가 고작 1년 왕위에 있을 줄 알았나. 여호람의 뒤를 이은 유다 왕 아하시야가 죽자 그의 모친 아달랴가 이어서 왕위에 올라 다윗 왕가를 멸하려하나 실패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로 혼탁의 연속이고, 탁류와 같은 인생은 오늘도 여전하다.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마다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가 누구에게 나의 번호를 알려주었고 저가 또 누구에게 말한 것인데, 형 저 누구예요! 하는 전화를 받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여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참 기구하게들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애가 둘이고 벌써 큰 애가 고3이 되고 작은 애가 고1이 된다고 했다. 그러다 무슨 일을 하며 사는가를 물었더니 아뿔싸, 태국여자 넷을 두고 불법 출장마사지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아찔하다가 애가 둘인데 그리 살아도 되겠나? 교회는 다니나? 안 사람은 뭐하나? 하며 마치 나는 저를 취조하듯 다그쳐 묻고 있었다. 무슨 말 끝에 애들 이야기가 나왔고, 고3 아이 때문에라도 한 번 같이 들르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야말로 삶이 혼탁하였고 저마다의 인생은 탁류와 같아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삶이란 참으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열여덟에 보육원을 도망치고 이후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모진 삶을 살았구나싶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난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애들부터라도 교회로 이끌어야겠다 싶어서 오라하였지만 마음이 어렵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오늘 아침 시편의 기도를 읊조린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행여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면 주께서 막으시기를. 어찌 거절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난감하여 주를 돌아본다. 그럴 때면 요즘은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말씀이 해답지 같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오직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사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주저하고 두려워한다.
저에 대해 토요일에 오는 녀석에게 물었더니 한술 더 떠서 가까이 하지 말라며 겁을 주는 게 아닌가? 둘이 같이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회에 나와서도 어떤 일로 시달렸는지, 저의 귀띔을 들으면서 더욱 더 마음이 어려웠는데… 재밌는 마음은 저녁께 온 우리 고1 아이와의 시간에서였다. 나는 그만두려고 밀어내고 밀어내는 쪽인데도 저 아이는 밀려오듯 다가오고 다가오는 게 아닌가? 주일에 오니? 하고 물었더니, 네!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대답이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나는 솔직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그저 지치고 힘에 겨울 따름이다. 본의 아니게 오후께 오는 열아홉 살 아이에게는 거의 말도 걸지 않고 바쁜 척하였다. 낮에 누구와의 통화로 마음이 어려웠던 탓이기도 하다. 하필 또 애도 전날에 하루 쉬고 왔으면서 뚱한 표정이니까 이거야 원, 언제까지 어르고 달래고 오냐오냐해야 하는 것인지.
그럴 때 바울은 전하였다.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오늘 내게 더하시는 말씀이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전 7:8).” 지혜자는 말하였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10).” 가정예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아내가 손위 처남 이야기를 잠깐 꺼냈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인근에서도 큰 교회인데, 말씀보다는 교회 확장에 열을 올리고 전도나 어떤 행사에 치중하는 것 같아 마음이 어렵다는 거였다. 조만간 나와 좀 상의를 하겠다는데, 나는 듣고만 있다 우리 교회로 오시라고 해! 하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 조화를 또 어찌 가늠할 길이 없어서도 말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어느 인생인들 고단하고 험난하지 않겠나? 우리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 대부분도 말은 못하지만 참으로 고단하다. 제대로 된 가정이 드물고, 그 부모 사이가 완만하지 못하니까 아이들은 저마다 속앓이를 하는데, 6학년 녀석은 폭식으로 이어져 체중이 엄청난데도 늘 손에 먹을 걸 들고 산다. 중1 여자 아이는 탈모가 와서 머리 곳곳이 듬성듬성하고, 누구는 조울증으로 감정기복이 심해서 아무 때나 울고 아무 때나 까불어댄다. 중2 아이가 가출을 모의하고 이제 중1 올라가는 여자아이들은 화장에 온갖 액세서리에 정신이 팔렸다. 참 신기한 것은 열에 아홉이 교회를 다니다 만 부모 밑에서 자란다. 개중 일곱은 이혼을 하였거나 다른 살림을 차렸다. 아이들은 공공연하게 서로의 비밀을 떠벌이고, 이와 같은 트라우마를 기제 삼아 마치 자신은 그래도 되는 아이쯤으로 함부로 행동한다. 가령 오후께 오는 우리 글방의 열아홉 살 아이도 그런 경우이다. 자신은 그렇다는 이유로 두문분출 집 밖으로 안 나오려고 하고,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그 부모는 설설 긴다. 교묘하게 이를 악용하여 아이는 집 밖으로 안 나와도 되는 사람처럼 자신을 치부해버렸다. 무기로 삼는 것이다. 즉 저의 고통이 목적이 되어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여긴다. ‘보육원 출신’에 장애가 있어, 자신의 불운한 삶은 뭘 해도 타당하다는 듯 버젓이 불업적인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사는 것이다. 어쩌자고 그러니! 하는 말이 어떻게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소리이겠나?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것이어서, 그래도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면서부터 녀석은 나의 단호한 말이나 엄한 꾸지람도 기꺼이 받아낸다. 다 용서해도 그 친구는 용서가 안 돼요! 절대 나는 걔가 싫어요! 하는 소릴 마흔네 살 먹은 것들이 서로를 향해 지껄인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라 해도 그치만은 용서가 안 된다는 소리에 나는 저들 사이의 감정을 헤아릴 길 없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차마 낮에 전화한 이에게는 그리 말할 수 없었으나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녀석에게는 그 입 다물라고 하였다. 말을 쏟다보면 속이 후련한 게 아니라 더 응어리진 감정이 솟구치는 법이어서 때로는 모질게 그 입을 막아야 한다. 나는 이제 아이의 눈물 앞에서 단호하다. 울지 마라. 저를 울려봐야 그 넋두리는 고스란히 자신을 변호하는 기제로 쓰일 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뭐? 그리 불행하게 살았으니 그리 함부로 살아도 된다는 소린가? 그래서 여전히 뒹굴면서 ‘리트윗’이나 ‘좋아요’ 같은 싸구려 호응과 지지에 목을 매고 살 것인가?
나는 더없이 주의 지혜를 구한다. 그 마음을 바란다. 나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그래서 손위 처남을 우리 교회로 오라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불법적인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그 일을 떠벌이는 녀석의 아이를 맡아야 하는 것인지, 늘 뚱하고 화가 난 것처럼 구는 아이를 언제까지 어르고 달래며 가야 하는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이어서 하나님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데 눈길이 닿았다. 그러할 때 바울의 고백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내가 이 부득불 할 일에 대하여 싫든 좋든, 결과가 어떠하든지 주만 바라고 해야 하는 일이어서,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욥 37:12).” 주가 이루어가실 것을 믿는다.
나는 다만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누구보다 못나고 연약하고 취약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주께서 아신다. 그럼에도 나 같은 이에게 맡기시는 일이라니! 그러하다면 주가 다 하실 생각이신 게 분명하다. 나의 버벅거림이 오히려 더 주를 바라게 하였다. 그러하여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젖 뗀 아이면 엄연한 의지로 어머니 품을 선호하는 것이다. 나 역시 주의 품에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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