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전봉석 2019. 12. 7. 07:17

 

 

여호야다가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대하 23:16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4

 

 

오늘 본문은 여호람의 사위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활약으로 요아스가 왕위에 오르고, 표독을 떨던 아달랴를 제거한 후 궁지에 몰렸던 다윗 일가를 회복시킨다. 특히 성전을 재건하고 그 맡은 바 직무와 종사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곧 한 사람의 몫으로 한 가정이 또는 교회가 파괴될 수도 있고 새로이 세워질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온 국민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부수고 그의 제단들과 형상들을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17).” 이로써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21).” 여기에 주께서 거주하신다.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32:14).”

 

누구의 전화번호를 등록하였더니 저의 카톡 계정이 활성화되었다. 아이 둘과 아내와 찍은 가족사진이 저의 프로필 사진과 사진첩에 있었다. 단란한 그 모습을 보며 더욱 마음이 아팠다. 왜 하나님이 새삼 저 친구를 연결하시는가, 사진 한 장이 강하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의 사진을 돌려보고 아내와 딸애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말 그대로 불법적인 일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 아이들부터 교회로 인도하고 저를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저의 온화한 표정과 단란한 가족들 사진을 보면서 그리 생각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결코 어쩌다 무슨 일을 조성하시지 않는다. 다 때가 있고 그 이유가 있다. 느닷없는 저와의 연결이 나에게는 그리 정리가 되었다. 무엇을 하든지!

 

나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의존이다. 주만 의뢰하는 마음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3:5).” 마치 지어내는 이야기처럼 다들 가지가지 하는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주를 의지할 수밖에.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데서 멈춘다. 얼마나 수시로 나의 판단과 기준으로 다른 길을 모색하고는 하는지. 딸애가 다음 주간 시험 때라 그 다음 주에 같이 갈게요, 하는 저의 전화를 받고 일순간 긴장이 풀어졌다. 저가 온다 하여 서둘러 알바 소녀도 보내고 청소도 끝내고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뤄지면서 보다 주를 의지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 되었다. 어떠하든 나는 이제 주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되레 이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주는 완전하시고 공의롭고 진실하시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32:4).” 그러므로 나는 더욱 주를 신뢰하고 사랑한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31:23).” 내 안에 내가 알아서 하려고 하는 모든 마음의 원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근심하다 혼자 제풀에 꺾여 낙심하곤 하는 나의 고약한 성미 말이다.

 

나의 약함에서 더욱 주의 강함을 본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50:2).” 주께서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기어이 나를 돌이켜 주 앞에 세우신 것처럼, 죽어도 안 올 것 같던 친구를 돌이켜 성경을 구하고 말씀을 갈구하게 하신 것처럼, 반드시 이 친구도 그 가정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믿는다.

 

그래서 행여 우리는 우리 곁의 누구, 어떤 문화, 풍토에 의해 길들여질까 주의해야 한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22:24-25).” 나만 안 그러면 되는 게 아니다. 본의 아니게 우린 자꾸 곁의 것을 따라 살게 돼 있다. 나는 저의 삶을 그리 이해하였다. 보육원에서 도망쳐 나와 의지할 데 없는 저에게 일을 주고, 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합법적인 일보다 불법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병이 옮는 것이지 건강이 옮지는 않는다. 곧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세상도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저를 돌이켜 주 앞에 되돌리는 일이란, 믿음으로밖에 다른 길은 없겠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서로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기회이겠구나. 이는 내가 저보다 무엇이 나아서가 아니라, 나는 주를 찾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주는 위대하시다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0:16).” 그러니 사랑으로 하자. 나의 측은지심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이는 곧 주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97:10).” 전의 나를 돌이켜 나의 영혼을 보전하신 이의 손길이었으니.

 

언제 어느 때 주의 날이 임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그러니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하나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어쩌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초조하고 긴장하고 내 마음이 앞서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의하게 하시려고 저와의 약속을 한두 주 미루신 게 틀림없다. 이처럼 말씀으로 마음을 다지시고 위로하시는 데서 분명해진다.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75:1).”

 

아이들과의 시간이 어떨 때는 힘들고 어떨 때는 위로가 되어서, 그날그날 나의 감정은 기복을 나타내지만, 어떠하든 주를 바라는 데는 나의 감정이 그처럼 중요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나는 어제 저녁에 같이 읽은 말씀에서 새로운 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저의 일을 판단하고 비난하라고 주께서 뜬금없이 저를 연결하신 게 아닐 거였다. 아침저녁 드나드는 우리 교회가 든 건물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합법과 불법이 혼용된 이 시대의 민낯을 본다. 광고전단이 온통 마시지업종과 화끈한노래주점들이 허다해도 같이 탔던 누가 하는 말이, ‘이 건물에 있으면 날마다 축제겠다하였다.

 

나는 어쩌면 저의 하는 일에서부터 경색됐는지도 모른다. 말로만 듣던 그런 일을 내가 아는 지척에서 실제 행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악이 먼 것이 아니었다. 악은 그리스 말로 카콘(KAKON)이라 하는데, ‘득이 되지 않는다또는 상대적인 불행’, ‘화를 입다’, ‘올바르지 않은 일을 당하다하는 뜻을 가졌다. 낮에 어느 책에서 읽고 메모해두었던 것이다. 저의 일을 악이라 규정하기에 앞서 우리가 모두 득과 실을 따지는 일, 상대적인 행과 불행을 논하는 모든 가치가 그 기준을 잃으면 모호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지 않으면 이해득실에 따라 악은 범위는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이는 주님의 마음이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8:2-3).” 괜한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주의 뜻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앞서 판단하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와 저의 딸아이를 보내시면, 보내시는 이가 또한 뜻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는 것일 테니까! 그때의 나의 자세를 염려하여야 한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거다. 긴 건 긴 거다. 그러므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내가 질만하니까 지우시는 일이라면 그 능력은 또한 주의 권능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실 일이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그러므로 주만 바라자. 말씀만 의뢰하자.

 

안달하여 저녁에는 모처럼 위경련이 일어 먹은 것도 없는 빈속을 다 기워냈다. 변기통을 부여잡고 쓴물을 토해내면서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주께 아뢰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아무리 의연한 척 굴지만 나는 지레 겁먹고 속 끓이고 걱정이 앞서고 불안에 휘말려 여느 날의 배나 되는 신경안정제를 먹었으면서도 기어이 토악질을 해대는 나의 나 됨을 주께 의탁하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나 같은 게 뭐라고이처럼 귀한 사명을 맡기셨는가나는 할 수 없어 주만 바라였다. 이에 이 온 땅의 것이 주의 것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전 10:26).”

 

마른 먼지만도 못한 내게 저 한 영혼을 맡기심인데 어찌 이를 소홀히 여기는가 싶어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나는 변기통을 붙들고 한참을 꺼이꺼이 억지로 기워냈다. 주여 나를 용서하시고, 나와 함께 하옵소서. 모든 게 다 주의 것인데, 내가 무얼 함부로 비난하고 업신여기며 판단하려 들었을까?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50:12).”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 내 힘을 빌리겠나?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어 내게 맡기시겠나? 이 모두가 주의 것임을.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89:11).”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132:7).” ,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