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대하 24:2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 왕은 금세 우상숭배를 일삼았다. 심지어는 뒤를 이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직언을 물리치고 저를 주의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인다. 우리의 악함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수시로 우리 안에 드는 우상숭배에 대해 일깨운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저버리는 것, 다른 무엇으로 위로를 삼고 대책을 강구하려는 모든 것,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 거기서 만족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도 그 중 하나이겠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였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1).” 오늘 내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은 어찌 함께 하시고 붙드시고 이끌어 오셨는가? 구름과 바다는 구원의 상징이다. 오늘의 내가 여기에 있는 것, 우리가 같이 주를 바라며 사모하게 된 것, 나는 어제 누구와 말씀을 나누면서 저의 장래에 대한 근심걱정에 대하여 그리 말해주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느 9:12).” 나의 삶은 돌아보면 그러하였는데, 너는 어떠했는지! 그렇게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시 78:14-17).”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배반하며 살아왔는지.
서둘러 일찍 오라 했더니 아홉 시쯤 저가 왔다. 오자마자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었는데 모든 게 다 오늘을 사는 문제들이었다. 일일이 그 말을 열거할 수는 없으나 하면 할수록 끝도 없는 게 근심걱정이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염려는 결코 줄지 않는 우물과 같다. 아무리 퍼내도 동일하게 고이고, 그 온도는 항상 18도를 유지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 같다. 늘 동일한데 바깥 온도 때문에 그리 느껴지는 것처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그러니 머리로 안다고 해서 가슴이 느끼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느낀다고 해서 몸으로 나타는 게 아니었다. 같은 말은 되풀이 되었고, 나는 저의 이어지는 질문을 중단시키고 설교 원고를 나눠주고 같이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의 말세는 오늘도 계속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예수님 때도 그 이전에도 말세였다. 우리는 몇 천 년이 흘렀으나 하나님의 날은 천 년이 하루 같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러니 원망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이는 곧 자신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이어서 자신을 그리 지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스로 속이는 게 우상숭배요, 그것이 하나님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 모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다. 말세에 있는 증상이다. 그때에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오늘까지 우리로 구름으로 인도하시고, 바다 가운데를 걷게 하시는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자. 나는 저에게 들려주는 말이 나에게 향하시는 말씀이었고, 이를 가지고 수시로 이는 우리의 우상을 깨는 일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이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저의 이어지는 질문과 어린아이 같은 발상에 일일이 답하고 그 문제로부터 이어지는 염려를 주의하였다. 앞서 바울은 이를 약한 양심으로 설명하며,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경계하였다. 곧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8:9,10).” 나는 낫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주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가령 몸이 더 안 좋아지면 어찌 살지, 그래서 이걸 해야 하지 않나? 저걸 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저의 염려는 그저 어린아이 같은 게 아니고 누구나 다 그러한 염려로 인하여 피곤할 따름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신뢰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능히 그리하셨고 그리하실 이시다. 먼저는 건지신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그리고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예수님도 이를 잘 아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저의 이런저런 염려가 또한 그 환경이 내 것과 중첩되어 나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더욱 속상하고 안타까울 때, 성경은 우리에게 보상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견디고 이겨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이를 말씀으로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누구도 영락없이 우상숭배에 빠져든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는 것이다. 한 세대도 가기 전에 저들은 도로 우상숭배를 일삼고 급기야 여호와의 전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을 돌로 쳐 죽였다. 이와 같은 참혹한 현실은 우리 현실에서도 매일매일 되풀이 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절실하게 그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지킨다. 문득 든 생각이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저는 평생 음란한 생각으로 시달렸다. 더욱이 주일 날 아침이면 더욱 심해져서 그 생각을 물리치느라 치열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 이내 누구는 시험에 들어 배교하나 누구는 그와 같은 것으로 더욱 주 앞에 나아간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계속 이어지는 엉뚱한 질문을 중단시키고 성경공부를 하였고, 끝나고도 이어지는 말을 제지하여 돌려보냈다. 내가 진이 빠지는 일이라 그 대답은 끝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바랄 것은 주님뿐이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우리의 호소는 주께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시 9:13).” 오늘을 사는 동안 염려가 없을 수는 없으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저마다의 근심은 늘 고여 있는 우물 같은 것. 것도 다르지 않아서 가만히 보면 아이 때의 것이니 어른이 되어서의 것이나, 그 물의 온도가 일정한 것처럼 다를 게 없다. 다만 그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짊어지고 사는 무게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그게 아니면 우상숭배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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