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19. 12. 9. 07:05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25: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2

 

 

다들 한결같기가 그처럼 어려운 모양이다. 저마다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우러러 일심으로 끝까지 하나 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가보다. 처음에는 이랬다가 나중에는 저러는 게 어찌 오늘 본문의 유다 왕 아마샤만 그러겠나? 전반부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다(~13), 후반부에서는 우상숭배로 돌아서고 이내 같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나의 마음도 몸도 주 앞에서 한결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행위가 정직하여도 온전한 마음이 아니면 어려운가보다.

 

문득 말씀은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하는 내용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하는 자로서의 동역자라 하지 않으시겠나? 함께 일하는 것, 행여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23:9).” 그러할 때의 암담함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있을까? 결국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밭이라.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13:24).” 이내 농부의 마음은 밭에 가 있고 하나님의 마음은 내게로 향하신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을 나의 사랑,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무리 교회가 예수의 피로 사신 것으로 그리스도가 그 교회의 머리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뭐하겠나?

 

아이가 물었다. 말씀의 결이 다른 것 같다고,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그 말씀의 깊이를 알 수 있겠나? 하고 말이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익숙함의 정도일 테고, 손에 익은 정도일 테고, 늘 곁에 모시고 사는 정도이지 않을까? 말씀을 기준으로 좌우정열 하였을 때 누구는 바로 곁에 서고 그 다음에 서고 그 다음에 서다 어디쯤은 저만치 떨어져 설 수도 있는 것일 테고, 이를 섣불리 어느 게 더 낫다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다. 다만 나의 하나님이라. 어느 훗날에 야곱의 고백에서도 이를 들을 수 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1:42).”

 

결이 다른 것 같으나 한결같은 마음이란 이런 결이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계셨고 이삭에게는 이삭의 하나님이 계셨으며 야곱에게는 야곱의 하나님이 계셨다. 이를 고백하기까지 우리의 오랜 기다림은 시간을 더하고 사연을 더하고 우여곡절 가운데서 얻어지는 역사이다. 곧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밭이다. 씨가 뿌려져 그 열매가 맺히는 데까지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13:25).” 한결같기가 그래서 어려운가보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26).” 이를 옳다 그르다, 어느 것을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자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27).” 나름 수고하고 애쓴 것인데,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 그럼 이를 어찌해야 할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 그것까지도 때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난한 기다림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수고보다 적극적인 참여이다. 동역이다. 그러할 때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이 집은 어물쩍 대충 지을 수 없다. 우리의 지혜란 시간이 더디 걸리더라도 모래 위에 짓지 않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7:24).” 그런데 이 일은 사탄에게도 일어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11:24).” 즉 우리는 하나님의 집일 수도 있지만 사탄의 집이 될 수도 있다.

 

공연히 마음은 자주 어렵고 힘에 부쳐, 나는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며 함께 읽는 요한복음에서 새삼 그와 같은 말씀이 아프게 다가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곧 내가 주의 살과 피를 먹는 거룩한 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나의 살과 피를 먹여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 시간이 들어가고 내 마음과 내 열의가 저에게 뜯기고 빨리고 이내 저에게 먹여져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예수님은 그 집을 채우라고 하신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14:23).”

 

누가 마뜩치 않고 저로 인해 곤비하기 이를 데 없다 해도, 저 아이를 데려다가 내 마음에 둠으로 나는 뜯기고 씹히고 빨려서, 내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것과 같이 저에게도 먹혀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결국은 내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것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말이 그렇지 삶이 어디 그런가? 그러기가 참으로 고달파서 한 날의 수고가 그 날에 족할 따름이다. 아이가 말씀의 깊이를 물으며 사모할 때 조급할 것 없다고 일러주었다. 먼저는 성경 통독을 권하였고 다음은 깊은 묵상을 권하였다.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몰라도 읽는 것과 쓰는 것을 쉬지 않는 일이면서, 그 의미를 두고 젊은 사자가 먹잇감을 놓지 않는 것과 같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일도 필요하다. 어떠하든 요동하지 않는 것이 묵상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31:4).” 이와 같이 주님도 나를 놓치지 않으실 것이다!

 

아이에게 이를 어찌 설명할까하다 내가 아침이면 다른 어떤 일보다 묵상하는 시간을 사수하고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까,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의지하지 않으면오늘에 오는 아이들이 너무 싫고, 내 곁에 두시는 사람에게서 모두 떠나버리고만 싶고, 어디로 훌쩍 숨어버리고만 싶은 심정에 대하여어쩌면 나는 병적이어서 그런가? 그게 심약하여서도 좋고, 병적이어도 좋고, 구제불능이라 해도 좋다. 내가 움킨 이 시간, 이 말씀을 사수하기는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하는 말씀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어디가 아파도, 불안이 밀려들어도, 아내와 딸애가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내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지난 날 나의 삶이 어떠했는가, 하는 따위에는 이제 관심도 없다. 어쩌고저쩌고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고, 나의 남은 생애이다. 과연 나는 죽는 날까지 한결같을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실 이를 모시고 사는 수밖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후 1:5).”

 

부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성경공부를 하며 그리 당부하였다. 모두가 떠난다 해도, 심지어 나의 건강과 가치와 기준마저도 무너져버린다 해도, 오직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예수의 터 위에 세워져 가는 그리스도의 집이 되기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리하여 나는 손을 든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13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