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대하 26: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135:14
아마샤가 죽고 웃시야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을 통치한다. 선지자 스가랴의 조언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다 늙어서 교만이 들어 성전의 분향을 자처하다 나병환자가 된다. 역대기서를 읽으면서 사람이 한 생을 사는 동안 온전히 주를 따르고 의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곧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행 7:8).” 비록 형들의 미움으로 이스마엘의 상인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간 요셉이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는 데 놀란다. 요셉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일정하게 이루어 가신다. 동일한 계획으로 성취하신다. 평안하고 평탄하다는 것이 결코 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샤에 이어 웃시야를 보면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아이들이 무섭다. 저들을 대하는 나의 모자람이 그러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 불안은 가중된다. 가령 아이는 조금 예민한 채 왔다. 급하게 글을 쓴 것을 읽고 다시 쓰게 하였다. 결국은 적잖은 가격을 주고 반지를 샀다. 도무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도 같고, 뭐라 한들 아무 소용도 없는 일 같아서 나는 낙담이 되었다. 벌써 스물넷이 되는데 차라리 어떤 기술을 좀 배우게 하는 낫지 않겠나, 생각하다가도 그게 정신적인 문제여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침에 오는데 초등학생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싸가지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날에 저쪽 교회에서 청년들과 모임을 갖는데 다들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는 아이의 말을 제지하며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야단을 쳤다. 누구의 시선 때문이고 세상의 어떤 소음 때문이라는 식의 자기변명을 하는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처럼 예민하게 굴면 그야말로 도로 병원에 입원하든가, 어찌 이 사회를 살겠나? 하고 아이를 나무랐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좋지 않게 돌려보냈고, 녀석은 일을 가면서도 도착해서도 내가 그리 야단을 쳐서 그런가,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매순간 보고를 하듯 카톡을 하고 전화를 하였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도 누구의 답 문자를 보여주고 전화를 하는데… 나야말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급기야 가정예배 때 날 좀 내버려두라고 짜증을 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다들 답이 없다. 그러니 자꾸 나더러 고맙다고 하거나 훌륭하다고 하는데 그 말도 지겨울 따름이다. 아이엄마와 통화를 좀 할까하다 그만두었다. 저와 대화하는 일이 더욱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자신이 누구보다 아들에 대해 잘 안다. 자신이 다 파악하고 있다. 저는 그런 식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 엄마가 가장 아들을 모른다. 하긴 저 또한 심신이 피곤해서 하는 소리겠으나.
그러니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까? 어떤 조언을 구할까? 나도 늘 상처받는 영혼이라! 설마 내가 저 아이를 어찌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 또는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나는 오후 내내 수납장 정돈을 하였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분명히 오늘의 이 일은 내게 힘에 부친다. 이러다 내가 먼저 미칠 것만 같다. 다들 이상해서 나는 오후에 오는 아이에게 말을 걸고 어르고 달래다 아이가 돌아가면 녹초가 된다. 하기 싫어 죽겠다. 다들 피해 어디로 도망치고 싶다. 그러니 어찌 감당이 되겠나? 한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효과도 없고 변화도 없고 나지는커녕 되레 악화되는 것만 같아서… 나는 우울하였다. 그러할 때 성경의 가르침은 미묘하게 다가오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악으로 깡으로 말씀 붙들고 서는 꼴이다. 아이를 뭐라 나무라다가도 온전하지 못한 것을, 그래서 장애인 것을 자꾸 뭐라 한다고 되겠나싶다가도. 그러니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놔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만 해야 하는 것인지,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지레 내가 죽겠어서 용을 쓰는 하루였다. 오후에는 아무 전화도 받지 않았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의 것도, 아이가 퇴근을 하였나, 해서 전화를 하는 것일 텐데도. 지겹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니 나는 어찌해야 할까?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2).” 말씀이 나를 때리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딸애가 다른 교회로 간 것도 나에게는 의기소침하게 하는 일이고, 아내가 대놓고 당신하고는 성경공부 안 해! 하였던 소리도 내내 상처가 되어 찌른다. 물론 나의 나 됨이 그 정도이고 저들에게 좋지 않은 것이어서 그렇겠지만, 그러니 누굴 탓할까? 하나님은 임의로 일하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1).”
내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정작 하나님이시지 않겠나? 나는 서로 이런 일을 두고 같이 대화하고 위로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누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저가 아이 이모여서 그런가, 더욱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하고 아내가 물을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먼저 올라온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은사의 정도가 정말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일까? 왜 하필 나 같은, 나 하나 건사하기 힘에 부치는 사람에게 이처럼 막중한 일을 맡겨두시는 것일까? 어떤 외로움인지 서글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기껏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서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안정제를 한 알 먹고 잠이 들었다. 힘에 부치는 일이다. 나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 주께서 감당하게 하시려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셔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데 필요한 만큼이 은사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게 다다. 내가 더 무엇을 하려 하는 것도 교만할 따름인지 모른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다. 누군들 좀 나아서 그 일을 행하겠나? 성경은 일갈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내가 한다고 나름 하려고 하면 그릇되기 십상이다. 십중팔구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어려움을 가중시킬 따름이다. 우리는 다 그릇된 길로 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결국은 나의 허물을 주가 담당하셨다. 아니면 나는 살 길이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누구의 허물을 짊어지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돼도 않을 일이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뭘 하려고 하지 말자. 웃시야가 기껏 주께 잘 향하다 늙어서 저가 제단에 나아가 분향하려 하는 것이 교만이었다.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마음이 저의 노년을 나병환자로 지내게 하였다. 오늘 본문이 암시하시는 바가 크다. 내가 하려고 할 때 어려움은 가중된다. 그런 걸 자꾸 잊는다. 보람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 요셉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드러나는 현상은 그러했어도 그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도는 엄연하였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그러니 저의 지난하고 모질었던 애굽에서의 억울한 노예살이와 옥살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 모든 게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창 1:4).” 이 날에 와서 느닷없이 어쩌다 행하여지는 일이 아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정하신 뜻이고 미리 아신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우리가 죄 짓지 전에 이미 구원의 계획을 세워져있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가만히 보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국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높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나는 오늘도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붙들고 때론 환멸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그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라 해도… 이로써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설 것을 믿는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그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계획하심을 의뢰하는 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이를 오늘 나에게 알게 하시려고! 그러니 나의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의뢰하고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누구의 위로도 동조도 얻을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외로이 요셉을 묵상하고 저의 표상인 예수를 묵상하였다. 그러할 때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어떠하든 찬송할 따름이다. 이는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2-3).” 나는 그의 집 그의 뜰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특별히 나는 주의 소유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4).” 고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5).” 부디 주만 바라자. 누구의 격려나 지지가 아니라, 어떤 답이 있어 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가 행하신다는…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6).”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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