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대하 28:23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시편 137:9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자식을 제물로 삼는 우상숭배에 열을 올렸다.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뭐라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암담하고 참담할 따름이다. 정말이지 말씀에 붙들려 주님만 의지하고 산다는 게 오히려 희귀한 것 같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대하 28:23).” 이를 보면 당장의 어떤 도움을 구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진득하니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기에는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뭔가 열정이 없고 남다른 체험이 없는 것 같고, 그저 밋밋하여 ‘이게 맞나?’ 싶은 나날 가운데 그래서 이단은 그처럼 뜨거운가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과 같이 산다. 이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사는 데 따른 우여곡절이 참으로 가관이다. 내 곁에 있는 아이들과 그들 가정의 사연과 그 부모의 됨됨이와 처지와 서로 그 마음에 꼬여버린 풀릴 것 같지 않은 증오와 갈등은 쌓여만 간다. 이러할 때 시인은 역설적으로 노래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9).”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바위에 메어치라! 버려라! 죽여라! 나의 자아가 죽지 않고는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저들 속에서 저들처럼 사는 것을 낙으로 삼을 따름이다.
마침 오후에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어서 아이가 읽었다는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을 읽었다. 돌아오는 금요일에 아이와 같이 독서토론을 해보자고 해서 그리한 것이다. 담임 교사 모리구치 유코의 딸아이가 자신이 근무하던 마이자 중학교 수영장에서 익사한다. 모두들 이를 사고사로 알지만, 이 사건은 소년 A로 칭하는 와타나베와 소년 B로 칭하는 나오키가 벌인 일이다. 그 사이에 반장인 소녀 미즈키가 있다.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유코의 고백으로 이어져, 미즈키, 나오키의 작은 누나가 읽는 나오키의 엄마의 일기, 나오키, 와타나베 그리고 다시 유코의 독백 형식으로 마무리 된다. 각각의 인물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증오가 있고, 그에 따른 제재 곧 자신이 나서서 행하는 복수가 있다. 이 소설은 작품성을 떠나 우리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과연 법적인 구속력 소년법은 정당한가? 그렇듯 직접 제재가 정당한가? 그 삐뚤어진 사고와 가치의 원인이 개별적인 문제인가? 계통적이라면 누구의 잘못인가? 등등.
솔직히 나는 모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불쾌하였고 불편하였고 불안하였다. ‘이런 책’을 읽으니까 아이의 정서가 그러하고,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닌가.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일, 저마다 붙들린 ‘바벨론’에서의 참담함에 대하여는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른 자업자득이 아닐까? 전에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래서 뭐?’ 하고 되물었던 적이 있다. 고아여서, 장애가 있어서, 보육원에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서…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이어지는 말에 나는 딴죽을 걸듯 그리 재차 물었던 것은 그래서 모두가 불운하게 사는 게 아니다. 그것을 핑계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그래서 뭐?’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게 아니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제는 감히 무슨 은혜인지 알겠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누구는 또한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누구는 끝내 돌이키지 않고 더욱 악하게 구는 일에 대하여… 역대서는 상대적으로 누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누구는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에 대하여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그래서 뭐?’ 하고 우리에게 되묻는 것도 같다. 서술 되지 않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역사적인 배경이나 저가 처한 심리적인 요인이나 그 온갖 구조의 갈등과 원망과 증오에 대하여 상상하다보면 마치 목을 졸리는 것 같다. ‘그래서 뭐?’ 그래서 다윗은 그러하여 다윗이 되었다. 욥은 그러하여 이내 고백하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나는 한 게 없는 사람이라 로마서의 ‘칭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나름은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였고 그 열심을 다해 사람을 사귀고 처한 일을 감당하며 나름은 성실하게 살았다고 여겼던 나의 날들이 돌아보면 모두가 포로로 잡혀 있는 바벨론에서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선별하여 무엇을 용서받은 게 아니라, 나의 전부를 용서하셨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우리가 하기 나름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은혜로 값없이 받은 것이라 한다면 이를 어찌 나의 수고로 주장할 수 있겠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고백>은 솔직히 아이와 같이 나눌만한 작품도 아니다. 너무 인위적인 인물 구성과 작위적인 사건의 전개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또한 저들의 내부에 쌓인 미움과 증오를 엽기적으로 발상하고 직접 보복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처연하였다. ‘소설이니까’ 하고 치부하기에도 당면한 유년에는 누구나 있었고, 실제 오늘의 아이들 심성에도 또한 다를 게 없겠으나… 이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 소설은 모방을 자극하고, 아이 스스로 그 내부의 갈등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도 크다. 우리는 결코 우리 의지로 의로울 수 없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2-25).”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의로울 수는 없다. 우리의 의는 외부에서 들어온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아이에게 아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는 말만큼 무서운 저주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가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처럼 악랄한 방관과 교만도 없다. 우리는 저마다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렇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된다. 아이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산 채로 제물로 드려, 그와 같은 악순환은 이 땅에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을 고르듯 물을 마시고 복도를 서성거렸다.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없는, 저마다의 미움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과 그 필연에 가까운 원인들 사이에서, ‘그래서 뭐?’ 하고 되묻고만 싶었다.
가령 오전에 오는 아이가 자기 생일에 이혼하여 떨어져 사는 아빠에게 선물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이 ‘목사님의 낚시 모자’였다. 아니, 네 생일 선물을 해주고 싶은 아빠에게 왜 그런 요구를 하였냐? 하고 나무라고 취소하게 하였으나, 이미 아빠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배송이 되고 있다는 말에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떤 안타까움, 뭔가 내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런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내재된 마음에는 사랑받고 싶은 아이의 처절함이 있는 것이다. 괜히 고맙기보다는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이를 어찌 해야 할까?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으로만 안전함을 얻을 수 없다. 누구의 사랑도 갈구하는 만큼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주가 행하심인데, 우연히 어쩌다 그리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이는 이미 정하신 바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를 위하여 오늘의 바벨론도 허용하셨다. 이를 아는 우리는 시온을 생각하며 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저 아이들의 비참한 지경을 보며 소리 내어 운다. 아,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다들 신났다고 흥에 겨워 있을 때 우리는 남모를 괴로움으로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5).”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허상과 허세와 허울 좋은 자기변명으로부터의 고통이 가중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6).” 이 암담한 현실에서 시인은 잔혹하게도 노래하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것을 버려라. 지키려 하고 지키지 못해 안달하는 나의 만족과 이상과 현실을, 그리하여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0) | 2019.12.14 |
---|---|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0) | 2019.12.13 |
하나님께 감사하라 (0) | 2019.12.11 |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0) | 2019.12.10 |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0) | 2019.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