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대하 29:36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편 138:2
히스기야는 왕위에 올라 제일 먼저 성전을 정화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여 감사 예물을 드리게 하였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두가 달라지고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하게 ‘나’로 그치지 않는 ‘나’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는 성경을 관통하는 진리로써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여기서의 ‘너’ 또한 야곱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의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개인의 ‘나’와 ‘너’를 초월하는 그 이상의 존재이고 가치가 된다.
가령 아이와 독서토론을 하기로 하면서 나는 넌지시 그와 같은 주제를 던졌다. 과연 저들의 미움과 분노, 복수와 제재는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전 세대의 것으로 오늘의 ‘나’에게 전가된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오늘도 다음 세대 또는 누군가에게 전이되는 것인가? 그런 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이는 아이의 지금 상태(?) ‘자기 이야기’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순전이 자기 이야기로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부모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어 부모는 그 이전의 부모의 것과 별개의 이야기가 아닌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 2:9).” 바울의 의도를 묵상하였다. 좀 다른 말로 돌려보면 모든 질병이나 고통의 인과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부모 세대의 질환이 가족력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같다.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식이다. 가장 두터운 무게는 역시 게으름인데 아이는 자신을 모른다. 생각은 많고 몸은 따르지 않으니 그 고통은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굳이 뭘 하려고 하지를 않으면서 남들 사는 데 따른 이의는 제기하고, 도무지 읽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뭐라도 말하려고 하니 그 어휘는 자기 위주의 것에서 맴돌 따름이다. 아직은 아이를 대놓고 뭐라 할 단계가 아니어서 나는 그저 주춤거릴 따름인데, 기도중이다.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게 해야 할까? 주일에 예배에 나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하면 이는 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니면 저 애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위하고 위로하고 감싸고 싶은 마음이 없다. 대체 내가 왜 ‘저런 아이’를… 같이 있다 보면 이런 마음이 수시로 드는 까닭이다. 싫든 좋든 나야말로 주의 마음을 달라고,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고 매달린다. 이는 애고 어른이고 다를 게 없고 성별과 나이와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결국은 인생의 가뭄이 와야 요셉을 만난다.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행 7:12).” 전에는 이미 요셉을 잊고 살았다. 슬픔으로 묻어둔 상태였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외면하였고, 야곱은 아비의 슬픔을 다독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에 저들에게 뿐 아니라 온 지경이 가뭄이 들었다. 우리 인생의 가뭄은 이로움이 크다. 차라리 아이에게도… 나는 종종 엉뚱한 생각을 한다. 하긴 그러한 가뭄이 있어 그 엄마가 궁리를 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보낼 생각을 한 것이겠으나….
어제도 아내와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사람보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또 어떤 아이와 어울리면서 누가 누굴 어찌 했고, 잘못하면 ‘학폭’이 열릴 수도 있는 상황이 된 모양이다. 하필 그 아이들이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이었고 걔 중에 한 아이가 그처럼 못되게 구는가보았다. 누구에게 말할 때 누구에 대해서는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아내에게 일렀다. 저쪽이 말하면 듣기만 하고 행여라도 맞장구를 치듯 같이 욕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 애고 어른이고 똑같다. 사람을 믿느니 개를 믿는 게 낫다. 어느 아이엄마와 긴 통화가 이뤄지느라 예배가 늦어졌다. 말 그대로 다들 난리다. 흥분한 전화 속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말씀은 일러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잠언 25:9).”
이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나는 심지어 아이의 말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 이유이다. 말이란 저 혼자 꿈틀거리는 요물이다. 감정을 실어 나르며 부풀이고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본디 말이다. 나는 그래서 다들 상담에서 쓰는 ‘이야기 해보세요.’ 하는 따위의 유도를 주의한다. 차라리 글로 쓰게 하고 그 일을 여러 번 생각하여 객관화시키기를 바란다. ‘내 문제, 내 이야기’로 함몰당하면 귀가 닫히고 생각의 통로는 하나밖에 열리지 않는다. 자신만 억울한 것이다. 아이엄마는 끝내 자기 아이는 그럴 애가 아니라는 소리만 되풀이 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곧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 성경의 기본 원리다.
우리는 우리에게 두시는 저 아이를 우리의 의지로 사랑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감쌀 수도 없다. 나는 종종 말하길 누구보다 나를 믿지 않는다. 나의 감정 또는 그 마음이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럴 것을 염려한다. 영락없었다. 스스로 일관되게 한결같은 마음은 없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게 마음이다. 하물며 남을 대하는 데 있어 그 마음을 두고 장담하는 일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다. 누구를 지지하고 무엇을 견지하는 게 그래서 다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아이의 퉁명스러운 말, 자기 집에서 서열 일 순위는 개다. 사람을 믿지 못해도 개는 믿는다나. 뭐라 말하려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한들! 주일에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안 한다 그럴까? 나는 아내에게 투정부리듯 그렇게 물었다. 아니면 도대체 ‘저런 아이’와 언제까지 이 허무한 씨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다들 그 고통이란 것이 짊어지고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그만큼은 이고 지고 살아가는 것들이다. 어찌 남 탓을 하겠나? 누구 잘못이랄 것도 없다. 부모 탓을 하겠나? 그런 운명을 타고 났다며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이를 탓할 것인가?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 아이 때문에도 나는 주를 의지한다. 그러저러한 사연들 때문에도 나는 버거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는 또 돈이 생겨서 병적으로(!) 신발을 사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회피하듯 너 혼자 가서 사라고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이는 좀이 쑤셔서 그런가? 자꾸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하였다. 글방 건너 백화점에 가서 같이 신발을 고르는데, 나는 내 것을 살 때도 아내가 알아서 사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싶은 안달인지 복달인지, 짜증이 또는 성가신 마음이 들었으나, 어쩌겠나? 것 또한 주께서 맡기신 일이라. 아이의 병적인 소비욕구는 실제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고… 아이의 병적인 개사랑은 단순히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온다 안 온다 연락도 없이 멋대로 구는 것이 아이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거 보면 오늘 날 우리 모두는 ‘영적인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허기지고 굶주려 아귀처럼 먹어대고 온갖 자기 욕구에 사로잡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하기는 싫은, 전형적인 무력감에 시달리는 꼴이었으니!
‘나’를 다스리는 게 ‘나’여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곧 다가올 성탄절의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곧 오늘의 ‘나’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저런 아이’는 곧 내 안의 옛 자아이기도 하다.
문득 저 아이를 내 앞에 두신 까닭은 내가 저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 138:1).” 그러한 것은 달리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더 골치인데 나 같은 자를 사랑하셔서 ‘저런 아이’를 ‘이런 나’에게 맡기심은 나로 하여금,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 그리 하게하려 하심이었다. 우리 안에 허물어진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 켜켜이 쌓인 불신과 원망과 남을 향한 비난을 거두어야 한다. 이에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3).”
그러므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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