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전봉석 2019. 12. 14. 06:18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대하 30:12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편 139:5-6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분열하여 각각 독립 국가를 형성한 뒤에 처음으로, 히스기야의 결행으로 온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을 함께 기념하고 주께 제사한다. 이때에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대하 30:12).” 하지만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10-11).” 결국 누구는 듣고, 누구는 비웃었다. 누구는 어째서 그렇고 누구는 어째서 그러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내 하나님의 손이하시는 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사이루어질 일이다.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미루던 마음으로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다시 교회 다녀라, 아이를 위해 기도해라, 하면서 10여 분을 쏘아대듯 떠들었다. 저는 뭔 소린가 하였고, 선생님이 힘드시면 그만 하셔도 돼요! 하는데, 앗! 괜히 전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힘들 걸 정말로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릴까?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태연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이는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고, 세례요한의 외침의 때에도 그러했다. 이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도 저들은 알지 못하였던 일이다.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되었다. 괜히 전화했다싶었다. 낮 동안에 아이와의 독서토론은 엉뚱한 주제로 흘러 괜한 말로 이어졌고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거론이 되지 않았다. 의도적인 회피와 자신은 상관없다는 식의 방관이 아이 스스로를 기피하게 하고 있었다.

 

교회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다. 우리가 같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으면 도무지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넣어 아이를 위해 기도해라하고 이른 것인데오히려 나만 뻘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말씀, 히스기야의 전갈에 누구는 비웃고 누구는 호응하는 것을 보며,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139:5-6).” 결국은 주께서 하실 일이다. 내가 뭘 하려고 할 게 아니었다. 다만 나는 지금 여기, 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하여도 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이내 다섯 시에 올 줄 알았던 아이는 오지 않았다. 이번 주간이 시험기간이라 주일에도 오지 않고 다른 날도 연락이 없는가했더니참 나의 마음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어서 오면 힘들고, 안 오면 신경이 쓰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조화는 내 것이 아니다.

 

아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프(taph)와 나아르(naar) 둘 다 쓰인다. 타프는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이고, 나아르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아이이다. 어느 시기가 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한데 저 아이나 아이엄마에게는 그와 같은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의존이나 애착이 아이엄마의 의존도는 애착의 정도와 다를 게 없다. 독립적이지 못하고, 그럼에도 서로는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 가령 한때 예수님의 부모도 그러했다. 다시 돌아가 아이 예수를 찾는 수고를 하였다.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2:45).” 하룻길을 가는 동안에도 곁에 없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같이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는 이내 타박이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

 

아이의 독립을 순순히 여기는 부모는 그리 흔하지 않다. 되레 자신들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으로 여긴다. 누구 말처럼 자식은 부모의 창조물이 아니라, 손님으로 우리 곁에 머물 따름이다.’ 일정부분 동의한다. 저들 모녀사이는 애증관계 같아서 좋은데 싫고, 필요한데 지겨우며, 떨어지고 싶은데 떼어놓지를 못한다. 나만 혼자 생각이 많을 뿐, 정작 당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일이다. 아뿔싸!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하는 오늘 말씀이 오늘에도 여전한 것이다. 이는 염연하여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별 수 없구나, 내가 설득하고 타이르고 권면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구나,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 이는 주님만이 하실 일이다. 나는 자꾸 이를 까먹는다. 아이엄마와 채 10여 분 통화하였을 뿐인데 금세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만 우습게 되었다. ,

 

매 순간 주님이 필요하오니

주여, 늘 곁에 계시옵소서 

-애니 셔우드(Anmie Sherwood)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이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1).” 아니면 길이 없다.

 

근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샤롯 엘리엇 (Charlotte Elliott)

 

나는 어쩌면 저들로 인해 실감한다. 오히려 내가 얻는 교훈이 크다. 주 은혜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일들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그 자체로 주의 권능이었다.

 

양심의 가책에 주저앉지 말고

자격 갖추기를 꿈꾸지도 마세요.

주께서 요구하시는 자격은

주님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뿐

주께서 이것을 주시니

성령의 돋는 햇볕입니다. 

-조셉 하트 (Joseph Hart)

 

그러므로 성령의 돋는 햇볕이 아니면, 나는 결코 저 아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없다. 그저 씨름하고 또 무던히 참고 견디는 것 말고는 내 일은 없다. 문득 드는 생각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가뭄을 일컬어 요셉에게 나아가는 경로를 그려주고 있었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7:11).” 결국은 그 영혼의 핍절을 통해 주의 은총을 바랄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우리는 우리 자신도 또는 누구의 구원도 선택할 수 없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2:17).” 그 필요를 느낄 때까지 나는 다만 저들 곁에 있을 뿐이다. 내가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저녁께 아이가 낚시모자를 사진으로 찍어서 목사님 선물이라며 앞서 자랑하듯 보내왔다. 어떤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먼저 나의 마음을 휩쓰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건 나의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감사히 받아야 하는 일이다. 나는 결코 누구의 의사가 아니다. 누구보다 더한 환자다. 그래서 건강한 나로서가 아니라 병든 자로서의 나를 여기에 두시는 것이었구나! 곧 우리 주님은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었다. 나를 여기에 두시는 까닭은 내가 좀 의로워서 또는 저들보다 건강해서 그리하신 게 아닌 것이다. 내가 더 환자라. 안달복달 내 안에 이는 병적인 조바심과 불안을 그대로 안고 주 앞에 서게 하시는 일은 그래서였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뜨고 뒤척거리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서는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21).”

 

인생의 역경과 그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면서도 그래서 더 주를 외면하고 말씀을 조롱하고 농담으로나 여기는 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께 드릴 것 없어

주의 십자가만 붙듭니다. 

- 오거스터스 탕레이디 (Augustus Toplady)

 

낮에 읽던 책을 메모하고, 이를 되새겨 묵상하면서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예수께서 함께 동행 하시는 동안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24:17).” 그러니 어쩌겠나? 길이 끝날 즈음에는 알 수 있으려나?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괜히 속상하고 답답하고 마음이 아픈데, 왜 내가 자꾸 속상하고 답답하고 안쓰러워 마음이 아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두는 그리 두시는 이의 거룩하신 뜻이겠거니, 나는 다만 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제임스 그리들리 스몰 (James Gridlay Small)

 

어떠하든 우리가 죄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고백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내가 이처럼 주께 나아가고 주의 곁에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 결국은 오늘 내 곁에 두시는 저 아이들 때문이 아니겠나? 나의 이 몽매한 육신과 늘 힘에 겨운 여러 가뭄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39:1).” 오늘 시인의 첫 마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나의 이 모든 날들을 주께서 정하셨으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그러므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