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대하 31:21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편 140:12
오늘을 사는 것으로 그 무게가 기울면 하나님을 믿는 일도 우상숭배가 되기 십상이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며 저의 여러 말을 듣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한데 영생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어서, 가령 오늘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처럼 혼신을 다해 예배로 드려지는 삶이다. 이를 맡은 자에게 온전히 예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십일조를 정비하여 바치게 하였다. 곧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1).”
나는 저에게 자신이 속한 교회와 그 한 지체로서의 삶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여기까지’ 선을 긋고 더는 가까이 가려하지 않고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니, 그 공백을 ‘야동’이 채워 위로를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가? 이를 ‘이해’로 접근하면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닌 게 된다. ‘그럴 수 있지!’ 한다고 해서 죄가 질병이 되고 외로움이 되고 그리하여 정신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은 엄연한 사망이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오늘 히스기야도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우선하였고, 그에 따른 수종드는 자의 삶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와 나’를 두셨고,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물론 저의 처지나 상황을 이해하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적당한 자리에서 더는 오고 가는 것을 경계하는 삶에 대하여는 이해가 간다. 이해가 되고, 안 됐다는 감상적인 동조로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신기한 게 그러면서도 우린 생각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좀 쉬고 싶고, 어디 멀리 떠나고 싶고, 그러그러한 삶을 낭만적으로 그리며 상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게 혼자 있는 시간이고, 누구보다 이길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어서… 너는 그렇게 너 자신을 믿니? 하고 물었다. 제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나’이고, 가장 힘든 것이 나의 생각과 실제의 삶의 괴리감이다. 가령 여유가 좀 생기면 느긋하게 책을 읽고 싶다는 말, 그보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없다. 평소 책 한 줄 안 읽던 사람이 여유가 생겨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할 줄을 모른다. 혼자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 자체로도 고역이다. 그 틈새를 온갖 부정한 것들이 끼어들어 상술을 펼치는데 그 가운데 가장 고질적인 것이 ‘야동’이다. 나는 마흔네 살의 총각의 서러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성화를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다. 태어났다고 해서 성숙도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듯이. 우리의 죗값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의 표현처럼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의 마이너스 통장이 예수님의 통장으로 전가된 것을 의미한다. 우린 이제 값을 물어야 하는 의무가 없다. 부채로 가득했던 통장이 깨끗해졌다. 하지만 잔고가 없다. 칭의란,
1) 신분의 변화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2) 원죄에서 놓여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7-18).”
3)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4) 그리스도의 대속함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5) 단회적으로 얻은 구원이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6) 죄와 사망의 법에서 놓여났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칭의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믿음으로 ‘저절로 얻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성화는 다르다. 성화란,
1)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2) 매일 범하게 되는 죄(자범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3) 날마다 조금씩 설령 더디기는 하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간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4) 이는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5) 지속적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얻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6) 결국 우리의 성화는 죄의 본질과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
이와 같은 복음의 원리를 같이 나누는 데 있어, 저는 계속 일상의 덫에서 헤어날 길을 궁리하고 나는 자꾸 말씀으로 이에서 놓여나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일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그리하여 나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그러하면 ‘너와 나’도 화목을 이룰 수 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종종 이야기할 때 ‘이것만은 어쩔 수 없고, 누구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소릴 듣는다. 한데 그 작은 일 같은 ‘~만은’ 하고 놓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 틈새로 ‘야동’이 자리 잡고, 누구에 대한 또는 어떤 일에 대하여는 도저히(?) 용서가 안 돼, 그 증오와 미움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저에게 이를 설명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을 하면서 내 안에도 여전한 것들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사람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으로 저를 품을 수 없다. 한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럴 때면 주의 마음을 맛보게 하시는데… 일주일째 연락 한 번 없어서, 말 그대로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오히려 홀가분해하며 또는 씁쓸해하며 있던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주일에 오겠다는 소린데, 이상하지? 그 말에 온갖 답답함도, 미움도, 싫음도, 심지어는 홀가분하다고 여기던 억지 평안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곧 나는 저의 ‘야동’이 고백과 동시에 주의 은혜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을 믿는다. 그 시간에 자꾸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 힘쓰라고 일렀다. 어쨌든 먼저 저들에게 곁을 줘야 저들도 손을 내밀고 한 지체로서 같이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게 아닌가! 자신이 손을 펴지 않고 ‘여기까지’ 하고 정해놓은 자리에서 교회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만큼 바보스러운 게 또 어디 있겠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 140:12).” 오히려 우리의 무기는 고난당함이다.
이에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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