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 6:14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산발랏과 그 무리들이 주의 뜻을 거스르고 느헤미야의 사역을 방해하고 심지어 살해하려 하나 저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그 가운데서 종교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정치적으로 저를 제거하려 하는 데 따른 정치와 종교의 영합이 곧 진리의 터를 무너지게 하는 것을 본다. 그러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그런 가운데 우리는 기도할 따름이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14).” 이는 곧 주만을 의지하는 자의 기본이겠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토요일에 오는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는 데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이 안 됐고 어렵다. 이처럼 자꾸 감정이입이 되면 안 된다고 알지만 그게 어디 또 그런가? 실제 그렇지 않고 어찌 저를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겠나?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을 보시고 우셨다. 곧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그 마음이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마침 딸애가 쉬어서 아내와 같이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성경공부를 마치고 ‘어디 가시나 봐요?’ 하고 묻는 친구에게 얼버무려 대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어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영화를 보다 도중에 나와 나 먼저 집으로 갔다. 이와 같은 신경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 모든 게 ‘주의 구조’라, 나는 그리 생각한다.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신경물질이 어떻게 작동하여 그것이 몸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천천히 걸어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가? 이단들의 포교가 극성이었고 신천지의 전단지에는 한교총의 대표가 구속을 면했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게 기독교냐? 하며 공격적으로 득세를 하였다. 서로가 가관이라. 그와 같은 열심은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뭐라 판단하기 전에 나 자신의 기준과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으로 나의 삶에 관여하신다.
누구로 인해 가슴도 답답하고 속도 불편해하는 나의 신경구조와 정치적인 신념이 종교적인 확신과 영합하여 득의양양 세상을 어지럽힘으로써 이단의 빌미가 되고 발판이 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그 모든 게 다 탐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뭔가를 이루려 하는 데서 말이다. 하지만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딛전 5:10).” 이를 묵상하며 어제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돌아보며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데 감사한다. 비록 몸은 힘들고 마음은 어려울지언정 허튼 데서 부화뇌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모르겠다. 난 그리 말씀만 의지할 따름이다. 하필 또 그 이단들의 포교에서 남성들이 대거 몰려나와 전단지를 돌리고 사람들 곁을 파고 드는 것을 보고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들 극성스럽게도 열심인데 행여 나는 너무 막연하고 안이한 게 아닌가, 하는. 억지라 하고 하겠나만 또한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겠나?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하나님만이 하시도록 나는 내가 나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의 신념이 신앙으로 여겨지지 않고, 나의 신앙이 우상숭배와 같이 맹목적이지 않게 하시며, 나의 확신이 온전히 말씀만을 붙들게 하심으로 ‘가만히 있는 것’도 엄청난 순종인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마치 내가 나서서 나의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으로 열심을 다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말이다. 보면 정치나 종교나 왜들 그처럼 맹목적이고 광신적인가 했더니 아무 것도 안 할 때가 아니라 자신이 뭔가 지나치게 열심일 때 그러하였다.
마치 오늘 말씀에서처럼 도비야와 산발랏의 정치적인 이유와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의 종교적인 영합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신들의 소행으로 마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하는 게 오히려 그 뜻을 훼방하는 결과를 나은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뜻을 살리려고 하는! 그럴 때 성경은 오히려 침묵하게 하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이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진리와 비진리가 혼용되어 정치적으로 야합하고 그 도구로 이용될 때 모두는 눈 먼 자가 된다. 뵈는 게 없는 것이다. 오로지 당리당략에 빠지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편향되고 편파적인 입장에 서는 까닭도 그래서이다. 나는 그 복잡한 길을 걸어서 지나오면서 여러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토요일에 오는 친구를 생각하고 아침마다 오는 아이를 생각하다 저마다의 힘듦을 알게 하시는 데 있어 나를 여기에 두시는 일이었으니…… 잠잠히 주만 바라자.
주께서 다스리시고 함께 하심을,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세상이 안달을 부리고 다들 미쳐 날 뛴다 해도,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2).” 아무리 그렇다 해도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그러므로 나는 주만 바랄 뿐이라.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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