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전봉석 2020. 1. 4. 06:5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 5:19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시편이 대부분은 애가다. 슬픔과 탄식의 노래다. 오늘 말씀 느헤미야의 내용도 이번에는 외적인 고통이 아니라 내부적인 어려움이다. 성벽 재건에 힘쓰는데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것이다. 있는 자들과 지도층이 좀 나누어주면 좋은데, 그래서 느헤미야는 개혁을 단행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양과 다를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슬픔의 탄식은 동일하고 이는 영구히 되풀이 되는 문제이다. 좀 시원하게 척척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특권을 가진 자들은 놓지 않으려 저항하고 저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오히려 저들의 부유함은 저절로 더해진다. 하긴 모 기업 어느 회장은 수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으면서도 그의 자산이 우리나라 부동의 1위다. 그가 보유한 주식이 지난해에도 천문학적인 배당으로 이윤을 더한 모양이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라, 우리의 신음을 깊어진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5:19).”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까?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0:17-18).” 오늘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고통이 우리로 더욱 주를 경외하고 의뢰하게 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시인의 호소는 간절할 따름이다. 우리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여기가 어딘지, 왜 우리로 여기에 세우셨는지, 정신이 번쩍 들게 하시는 것이다. 저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10:3).” 우리의 탄원은 하나님께로만 통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더 잘 사는 것 같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 왜냐하면 저들은 가관이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4).”

 

그럼에도 저들의 삶은 윤택하기 그지없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73:4-9).” 나는 어제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고치면서 오히려 더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이어질 애가의 말씀을 가지고 과연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우울감만 더해지는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 시편을 늘 묵상하고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가 없는 세상을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이를 생각하는 일에서도 저의 일상이 안타깝고 그 미래가 암담하여 속상해하는 것이었으니, 나로서는 종종 이와 같은 감정이입이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몸은 저 혼자 어디가 아팠다 말았다 하고 신경증적인 불안증세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 혼자 들썩거리기 일쑤여서 아이의 상태처럼 조증과 울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늘 이도저도 아닌 것만 같다. 그렇듯 걱정이 태산인 내게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2:4).” 설교 본문인 시편 2편의 말씀이 절실하고 간절하게 다가오는 거였다. 하나님이 웃으신다. 이 하찮은 일로 신음하는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상기시킨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신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모 회장의 불어나는 보유자산이 부럽겠나? 아니면 누가 뭐래도 건재하여 세상을 호령하고 사는 사람들의 겁 없는 삶이 부럽겠나?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 경로로 나를 찾아오시는가하면 원고를 작성할 때도, 수정할 때도, 이처럼 다시 묵상할 때도, 그리고 이를 설교할 때도 그때마다 나를 먼저 위로하시고 감화하시는 손길이 복이었다. 아이가 은행업무 일로 오전에 오지 않아 모처럼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심심하지 않아? 하고 아내가 걱정하지만 나는 좋았다. 새로 구입한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간이해>를 읽게 된 것은 전에 아이가 읽다 말았다는 <미움 받을 용기>를 읽다가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어서 연말에 포인트 정산으로 제값보다 싸게 구입하였던 것이다. 하다못해 그런 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기꺼이 내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 , 내가 그랬구나! 하면 여러 곳에 밑줄도 그었다. 우리가 누구를 이해하고 헤아린다는 것은 그저 그럴 수 있는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다. 저의 돼먹잖은 모든 것에서 그와 같은 역겨움을 참아내는 일이고 끈기 있게 기다려줘야 하는 일인데, 실은 이것이 항상 나의 주님에 나로 인해 당하셨던 일들이었다니!

 

주의 신실하심이 아니면 나는 설 자리가 없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그게 다 나의 행실과 소행으로 미뤄 얻어진 것이라면 모를까, 누구보다 추하고 쓸모없는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일이었으니.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 말씀 앞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내 영혼을 주께 한다는 일, 하루의 이 모양 저 모양을 그저 주께 내어드리는 수밖에!

 

모처럼 저녁에 끝내고 아내와 같이 기독서점에를 갔다가 문이 닫혀 같이 저녁을 먹고 왔다. 그러는 동안 평소와 다른 행보 때문에 긴장해서였을까?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도 그것이 얹히고 속이 볶여 어려움을 겪다 잠들었다. 그러는 내 자신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내는 쯧쯧 혀를 찰 정도이니 나 원 참. 그러니 말씀은 내게 더욱 주를 의지하고 주께 피할 수 있게 해주신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31:9).” 그러나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 내 안이 두 갈래 길에서 나는 번번이 길을 잃기 일쑤지만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99:3).”

 

오늘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가 어제 퇴근길에 잠깐 통화를 하였다. 곧 퇴사인데 회유를 하려는 것인지, 퇴직금을 정산하는 데 있어 꼼수를 부리는 것인지, 저의 약점을 가지고 이리저리 떠보는 사람들의 모질고 저질스러운 행태가 역겨워서 화가 났다. 물론 아직은 에이, 설마하고 대답해주며 저를 위로하였지만 잘하면 퇴직금의 상당부분을 못 받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묻는데 내가 아나? 그냥 자꾸 속상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고 분이 나서, 그래서 저녁으로 먹는 게 얹힌 것인가 모르겠다. , 세상이 참 악하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0:12).” 우리는 주께 호소할 따름이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13).”

 

이처럼 한 영혼을 위하고 이해한다는 일은 막연한 이론이나 먼발치께 서서 쯧쯧 하며 혀를 차는 정도의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쩌면 이 또한 내게 두시는 사명이라, 내일 일찍 가서 말씀드릴게요! 하는 저에게 오지 마라,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이어서있는 자에게 7, 800만 원 정도야 별 거 아니겠으나 저의 4년 일한 알토란같은 퇴직금인데나는 괜히 내가 서러워서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4).” 오늘처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나의 호소가 되고 나의 부르짖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15).”

 

어디에 고소하고 어떻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이는데도 그러자니 또 역으로 감당해야 할 저의 서러움을, 나는 차마 뭐라고 말도 못해주겠고 듣고만 있는데도 속이 상해서 쩔쩔매었다. 부디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