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2 주일
시편 10:17-18, 애 3:33
하나님의 본심
시편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0: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예레미야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들어가는 말
왜 불행과 고통을 우리에게 두시는가! 마치 하나님은 어디 숨으신 것 같고, 멀리 서신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 하고 다윗처럼 묻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하는 욥의 심정처럼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욥의 고백을 좀 더 들어보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6-7).” 하는 확신이 더해진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다 해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하는 이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통은 믿음이 좋은 자나 없는 자나 다를 게 없다. 다들 그 책임을 종종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우리 자신들 때문이다. 만물도 우리들로 인해 탄식한다고 하였다. 오늘은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를 같이 나누려고 한다. 그 깊은 고통의 의미와 하나님의 본심을 살피려고 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2).”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엄연히 경고하셨던 일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고로 오늘의 고통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14).”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총은 되풀이 된다. 한없는 긍휼을 더하셨다. 이를 예레미야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 우리의 절규
오늘 시인의 절규를 다시 들어보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이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듯하지만 오히려 주의 긍휼하심과 무한한 자비하심을 나타낸다.
1) 세상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 10:2-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4).” 그 예가 ‘인생 뭐 있어?’ 하는 말이다. 스스로 높여 바벨탑을 쌓는다. 그리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곧 자신들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앉히는 것이다.
2)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고, 돌보지 않으신다고 한다(시 10:5-11).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11).” 실제 오늘과 같은 문명의 시대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사는 것이 훨씬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면서 온갖 신들을 찾아간다.
2. 우리의 사명
오늘 시인은 그런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금 일깨운다. 우리는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래서 우리 입에 기도가 담기지 않으면 원망과 저주가 찾아든다.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시 59:7).”
1)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13).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 성경에서의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은 물론 그 심령의 가난한 것을 의미한다. 그 속이 허한 경우다. 그래서들 맹신과 광신적으로 사이비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2) 우리는 주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시 10:14-15).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4).”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함께 하시고 늘 긍휼을 더하신 이들도 저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 14:13).” 곧 가난이 우리로 간절하게 한다.
3)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왕이 되심을 안다(시 10:16-18).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16).” 실제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무리가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약자들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하나님으로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3. 예레미야의 기도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 애가를 같이 보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자 한다. 곧 고통은 다 목적이 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저들의 상태를 앎으로 우리 자신을 바로할 수 있다.
1)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 예레미야의 애가와 시편의 탄식에서 ‘악인’들은 누군가? ‘저들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압박하고, 그의 마음에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린다.’ 또한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는 사상으로 산다(시 10:2-4). 이를 예레미야는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애 3:34).” 같은 짓이라고 하였다. 즉 요즘 말로하면 ‘갑질’이다. 자신의 재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괄시한다. 심지어 악용하고 저들의 삶을 피폐하게 짓밟는다. 그리고는 이를 하나님이 모르실 줄로 안다.
2)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 저들의 길은 견고한 것 같다. 주의 심판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남을 멸시하고 그 마음에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자부하며 산다. ‘저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있다.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가득하다(시 10:5-7). 이와 같은 저들을 예레미야는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애 3:34). 즉 가장 공정해야 하는 재판이 저들의 권력과 권세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부여 받은 권한을 악용한다. 저들만의 인맥과 은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자기들끼리 덮어주고, 은폐하고 서로의 잘못을 뒤집어버린다. 이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처사다.
3)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 그러므로 저들은 힘없는 자의 송사를 가소롭게 여긴다. 역으로 자신들의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오늘 시편 8절부터 보면, ‘이 사회의 은밀한 곳에 앉아 무죄한 자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면서 저들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본다.’ 이는 마치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는 것과 같다. 저들은 법 위에 있다. 군대를 면제 받고, 학사 일정과 상관없이 학위를 따고, 자녀들을 원하는 곳에 입학시키고,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진다(시 10:8-10). 이와 같은 호소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애 3:36).”
4. 하나님의 본심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1) 주께서 인생으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곧 그와 같이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 모두가 고통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 의도는 주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33:8).” 주를 거역하고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바벨’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결국 우리를 이끌어내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일련의 고통은 다 목적이 있다. 그래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2) 주께서 메우셨음이라 고통이 길다고 포기하겠나? ‘기차가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어버릴 것인가? 뛰어내릴 것인가?’ 우리는 다만 기관사를 믿고 기다리듯이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애 3:28).” 우리의 고통은 목적이 있고, 반드시 그 끝은 온다. 그러니 어쩌면 좋은가? 예레미야의 단도직입적인 충고를 들어보자.
①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29).” 즉 원망과 불평,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 나오는 그 입을 땅에 대고, 그 입 다물고 있으라는 소리다.
②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0).” 다시 말해 ‘어디 한 번 맘대로 해봐라!’ 하고 심정으로 오늘의 치욕으로 차라리 배불리라는 것이다. 속된 말로 ‘될 대로 되라’ 하는 소린데, 이는 믿음이 없는 자의 자포자기와 다르다. 온전한 믿음으로 주를 의뢰함이다.
③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 곧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다시 말해 허튼 데 용 쓰지 말고, 혹시나 하고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주께 부르짖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찾게 하고 만나게 하실 것이다.
나오는 말
기도는 주께 아뢰는 것,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오늘 우리는 악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는지(13), 이를 보시고 갚아주시고 외로운 자들 도우시기를(14), ‘악인의 팔을 꺾으’시고, 저들이 승승장구할 때 그 끝을 정하시고(15), 저들의 결과는 멸망인 것을…(16). 하지만 우리는 주를 의뢰함으로 겸손하여지고, 그러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실 것이며,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17). 오늘 우리의 고통의 목적이었다. 더는 압제와 억압이 없는 영원무궁한 주의 영광의 날들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 없는 나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을…(18).
우리에게 고통은 목적이 있고, 저들에게 고통은 이유가 있었다. 곧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을 절대 잊으실 리 없다.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실 리 없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굳게 붙든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2편 / 안전지대 (0) | 2020.04.03 |
---|---|
시편 11편 /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0) | 2020.03.27 |
시편 9:10-11 / 주의 이름을 아는 자 (0) | 2020.03.05 |
시편 8편 /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0) | 2020.02.28 |
시편 7편 10-17절 / 우리의 방패는 감사와 찬송이다 (0) | 2020.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