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5 주일
시편 12편
안전지대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12: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12: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들어가는 말
다윗의 영성은 거저 생긴 게 아니다. 그런 그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 27:1).” 저는, ‘생각하였다.’ 우리의 생각이란! ‘내가 이러다 사울에게 잡히겠으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게 좋겠다.’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살 궁리를 하게 마련인데, 반드시 다른 것을 쥐면 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게 되어 있다. 인생에 있어 빈손이란 없다.
블레셋 땅이 어떤 곳인가? 저들의 무신론적인 또는 다신론적인 사고가 다윗의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놓아버리게 하였다. 저가 쥐고 붙들었던 신앙은 무색하게 되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건강은 전염되지 않는데 질병은 전염된다. 무신론적인 사고는 비도덕적인 사고방식을 낳는다. 결국 신앙을 저버리면 세상과 동화되게 되어 있다. 다윗의 생활은 이중적이 되었고, 말과 행동이 달라 앞에서 이 말하고 뒤에서 달리 행동하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전략적이었다 해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신앙생활은 바다에 빠진 것과 같다. 수영하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우리가 향해 가는 나라는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 시대에 누구도 달가워서 가는 길은 아닌 것이다. 마땅히 세상에 살면서 세상처럼 누리고 즐기며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로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하셨다. 세상과 결탁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그러다 무신론적인 삶에 동화되고 비도덕인 삶을 받아들임으로 이중적인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두고 보지 않으신다. 돌이키기 위해 모든 것을 빼앗으신다. 탕자처럼 말이다. 그럴 때 자녀들의 특별함은 아버지의 집,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1) 여호와여 도우소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안과 공포가 길어지면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할 때 아예 안 믿는 무신론자가 되거나, 광신도가 되어 합리적이거나 신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느 시대에나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복음으로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쥔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쥘 수 없다. 무엇을 붙들 것인가?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왜들 그러는 것일까?
2) 세상은 거짓말과 아첨과 두 마음이 지배한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
이번 달 15일, 우리나라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선거철이 되면 온갖 말들이 쏟아진다. 거짓이 난무하고 서로를 모함한다. 겉과 속이 다른 말은 분간하기 어렵다. 거짓 선생과 적그리스도인들이 출몰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저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인기를 얻어 진리와 비진리를 혼용하고 교회와 교회 밖의 삶을 섞어놓는다. 그러자 성경이 경고하신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3) 우리의 입술을 주관하시는 자가 계시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3-4).”
하나님은 이를 끊으실 것이다. 저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혀를 자부한다. 말에 대한 책임은커녕 능숙하게 자신을 합리화한다. 남을 탓하고, 자신의 말을 남에게 전가한다. 언제나 저들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리다.’ 다만 자신의 말을 몰라주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시 64:3-4).” 이를 지혜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엄히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늘 저들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다.
4)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안전지대가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우리는 결국 주께 피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세상과 같이 멸망하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빼앗아서라도 돌이키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내가 좋아하는 폴 투르니에는 말했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서야 더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이 C. S. 루이스도 아내를 잃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혹하신 자비’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로 안전지대에 두신다. 때론 그것이 불안증이기도 하다. 가난이기도 하고 열심을 다해 애썼으나 실패일 수도 있다. 탕자가 그토록 사랑하던 재물을 다 탕진하고 내몰린 돼지우리일 때도 있다. 비로소 우리는 주를 바라는 곳, 온전히 주의 사랑으로만 만족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말씀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진리다. 복된 소식, 복음이다.
5) 말씀으로만 충만한 삶을 살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6-8).”
오늘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어느 날 우연처럼 드려지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할 수 있는 것은 늙은 바울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더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이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은 없다. 곧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그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영성이다.
나오는 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곧 말씀의 순결함은 우리로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이 되게 하신다. 곧 우리의 영성은 겸손이다. 그런 우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신다. 아무리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다 해도,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뛴다 해도 우리의 겸손은 아버지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으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18-22).” 저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겸손은 첫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둘째, 우리의 겸손은 예수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셋째, 겸손은 진리만을 추구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6-7).” 넷째, 우리의 겸손은 모든 게 은혜인 것을 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다섯째, 우리의 겸손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오직 말씀만을 붙든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여섯째, 겸손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를 수용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마지막으로 일곱째, 우리의 겸손은 우리 삶의 모든 가치가 주님께만 있음을 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에 우리의 겸손은 잠잠히 주를 바랄 뿐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그리하면 말씀을 더하심으로,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 32:2).”
고로 우리의 안전지대는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그분의 약속이다. 고로 하나님의 숨결이다. 이를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이로써 우리는 주의 안전지대에서 맡기신 남은 인생을 다한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과 같은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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