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1편 /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전봉석 2020. 3. 27. 10:47

20200329 주일

 

시편 11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11: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들어가는 말


두려움은 믿음의 정도와 다르다. 느낌과 고백은 별개다. 두려움과 공포는 느낌이고, 고백은 믿음으로 드려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그러므로 공포를 느끼면서도 신앙의 고백은 드려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공포나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으나 이를 가볍게 할 수 있고, 견디며 이겨낼 새 힘을 얻을 수는 있다. 곧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느낄 때 믿음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이를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속사람은 거듭난 성도들만의 것이다.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것은 병들고 노쇠하여지는 일이다. 성도들은 이를 크게 괘념치 않는다.

 

오늘 날 일련의 사태를 통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도 의연할 수 없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되다. 하지만 이것이 과시나 허세가 아닌 신앙고백으로 드려지면 다르다. ‘나는 두렵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이다(27:1). 그래서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 1962년 블렉크혼이 시로 지은,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에서도 그렇다. 저는 말하길,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하고 큰소리쳤다. 그는 지금 어두운 밤에 풍랑이 몰아치는 배 위에 있으면서 말이다. 이는 허세가 아니었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도 여호와가 내 생명의 능력이시다라는 믿음 때문이다.

 

괜찮아, 인생 뭐 있어?’ 하는 젊은 애들의 허세와 다르다. 불신자들의 과장된 용기가 아니다. 우리는 괜찮아,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거야!’ 하는 믿음으로의 고백이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고백에서도 뚜렷해진다. 저들은 지금 불속에 던져져 죽을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3:17).” 하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다. 그 믿음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이것이 믿음의 진수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신앙고백 그 이상의 보증을 갖는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7:22).”

 

1. 시적 정황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일련의 사태가 터지면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대처와 대안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먼저 주께 피하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우리더러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충고한다.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구할 대상을 찾는다(121:1). 그러나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하는 고백이 바로 저들과 다른 우리의 것이다.

 

또한 오늘 시를 보면 저들은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는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10:2).” 그리고 도리질하듯 한두 사람이 말을 보태면 삽시간에 여론이 조성되고 모든 문제의 책임을 특정하여 전가한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터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이는 믿는 자의 기본기준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이것이 우리의 기본자세다. 정부를 탓하고 어느 단체를 욕하고 누구를 지목하여 정죄할 일이 아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터를 둔다. 우리의 기본 터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명제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3:25).”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11:5).”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함을 그대로 두고 계시지만은 않는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6).”

 

모든 상황은 우리의 선택이다. 선택은 책임이다. 인격적인 존재의 숙명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곧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것은 우리로 의롭다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일은 우리로 의로운 일을 좋아하는사람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엄히 강조하시며,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16).” 곧 외식함이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외식함이란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것이다. 다들 이를 위해 산다.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경계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무얼까?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그리하면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91:12).”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그것으로 우리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91:13).”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다 같은 말씀이다. 고로 우리가 이긴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우리의 체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믿 11:1-2).”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는 체험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려지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 노아는 믿음으로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증거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11:39-40).” 그럼에도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6-38).” 이는 단순한 믿음 그 이상의 말씀이 주는 확신이다.

 

3. 우리의 소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어느 연주자의 고백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리허설 하는 중이다. 정식으로 본 공연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러므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하는 시인의 고백은 유익하다. 그러할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하는 말씀이 귀하다. 그럼 그것이 우리 의지로 그럴 수 있는가? 누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면 두렵다. 하지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실 것이다(23:4). 이와 같은 고백이 허풍이 아닌 것은 이상하게도 내 안에 드는 믿음 때문이다. 내가 그리 믿는 게 아니라 그리 믿어지게끔 하시는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그 빛이 무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즉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을 주께 내려놓고 맡기는 일이다. 염려와 근심은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한다. 그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29-31).” 하시는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오늘 시편의 첫 구절을 다시 보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다들 뭐라 해도, 우리는 여호와께 피할 뿐이다. 저들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겠으나, 우리의 남은 생의 소원도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91:14).” 즉 우리는 더욱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시편의 모든 구조가 그러하다. 똑같이 죽겠다 죽겠다하지만 우리는 주께로 도망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설령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그래서 저들은 스스로 활을 당겨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의 믿음의 터를 굳건히 지킨다. ‘터가 무너지면모든 게 무너진다. 우리는 그의 성전에머물기를 소원한다. 아무리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다. 오늘 시인은 이를 강조하였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5).” 단언하건대 저들의 그물에는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고로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21:31).”

 

그러므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하는 오늘 시편의 고백은 우리의 것이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와 같이 인생을 항해하는 동안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수시로 우리를 엄습하지만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하는 신앙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4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