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2 주일
시편 13편
어느 때까지니이까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들어가는 말
고통이 지속될 때,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 시편은 우리에게 그 일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론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알려준다. 평소 우리는 나누지 못하고 사는 이야기들이 많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가감 없이 속엣 얘기를 다 드러내며 지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금세 싫증을 내거나 서로를 감당할 수 없어 외면한다. 이에 지혜자는,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하였다(잠 14:13). 곧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10). 이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오늘 시편은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할 말 못할 말 다 해도 되는 상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처음 두 구절에서 무려 네 번씩이나 그리 묻고, 이를 ‘잊으시나이까?’, 언제까지 ‘숨으시나이까?’, 이게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하고 끈덕지게 괴로움을 토로해도 되는 상대를 말이다. 이는 가족도 그리할 수 없다. 한다 한들 민망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심정을 연거푸 얼마든지 토로하고, 묻고, 징징거리고, 칭얼거리고, 떼쓰고 이를 가감 없이 다 아뢰어도 되는…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심을 알려준다. 이 시의 구조는 또한 신기하게도 우리의 속엣 이야기를 마음껏 탄식(1-2)하다보면 이것이 기도가 되고(3-4), 기도로 드려지던 것이 어느새 찬송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5-6).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본문과 함께 우리 안의 그릇된 자아를 ‘아브람’과 ‘리브가’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을 향해 자기의 판단을 따르고, 다른 하나는 남을 향해 자신의 판단을 강요한다. 오늘 시편은 ‘탄식--> 기도--> 찬송’이라는 명료한 경로를 제시하는데 이를 저해하는 우리 안의 불투명한 자아를 저들의 사례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1. 자기 판단이 자신을 이끄는 사례: 아브람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기 이전의 모형이다. 이를 바울 사도는 성경적으로 명확히 정립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같은 사람이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보완하고 수정하여 나아진 인물도 아니다.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쨌든 저는 말씀을 의지하였다. 그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다.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땅을 갈아엎어 흙과 돌을 고르고 잡초와 가시떨기를 개간해야 한다. 그러기까지, 저는 남방으로 옮겨가다 기근을 만났다. 그래서 자기의 판단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자구책을 찾은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누이로 거짓말하기도 했다(창 12:17). 또한 자기의 판단으로 같이 갈데아 우르를 떠났던 조카 롯과 네게브에서 분쟁이 생겨 갈라져야 했다(13장). 거기서 조카 롯은 요단 지역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저들의 소요에 말려 포로로 끌려갔다(13:12), 아브람은 가신(家臣)을 데리고 가서 저를 구출했다(13-16). 후에 소돔은 멸망하였고 롯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19:12-22).
그때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셨다(15:1). 아브람은 거기서도 자기의 판단을 앞세웠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 분명히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4).” 저는 또 아내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었다(16:2).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에서도,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7-18).”
믿음이란 우리가 임의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결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 갖는 것은 신념이고 의지다. 신념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 안에 ‘아브람의 속성-신념’은 언제나 건재하여서 수시로 자신의 판단과 말씀의 약속을 혼동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식하기보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일을 재구성하려 한다.
2. 자기 판단이 남에게 나타나는 사례: 리브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창 27:13).”
여기 또 한 사례를 들자면 남의 일에 지나치게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는 경우다. 특히 자식 일에는 모든 부모가 자유롭지 못하다. 천륜이니 인륜이니 하는 인연을 내세우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판단을 남에게 적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려 한다. 리브가는 분명히 임신했을 때 말씀으로 약속을 들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택함과 불택함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쩌다 형성되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바울도 이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즉 하나님의 주권임을 명확히 정립하였다. 이는 우리의 이해 너머의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이고 섭리다. 어떻게 그리 나뉘고 무슨 기준으로 그리 구분하시는지,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굳이 또 알아야 하는 일도 아니다. 실제 사람은 자신의 뇌를 10%도 사용하지 못하면서 산다. 그러면서 유난을 떨 듯 자신들의 이해와 판단을 숭상하려 든다.
아무튼 리브가는 남편 이삭이 나이 들어 앞뒤 분간을 못하는 노인이 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하나님을 의심했다. 축복의 약속을 성취하셔야 하는데 이삭의 판단은 틀렸고 하나님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만 하라(창 27:8). 여기서 ‘나’의 관점에서 ‘내가’ 주체가 되는 주장이 연이어 나온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그러니까 이게 다 널 위해서다! 내가 판단하는 게 옳다! 그런 소리다.
심리학에서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올바른 분리과정을 겪지 못하면 서로는 서로에게 억압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즉 유아기 때의 반항기와 청소년기의 사춘기는 건전한 분리과정을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여기서 독립되고 균형감각 있는 자아가 형성되고, 정체성이 올바로 확립돼야 한다. 그런데 서로의 밀착이 온전하게 분리되지 못하면 아이는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서 귀속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매여 의존하고, 억압하고, 강제한다. 이는 보편적인 이론이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자기 판단을 아들에게 행사했고, 그로 인해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은 원수가 되었다. 이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도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하면서 리브가는 자신의 판단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한다(43). 한 번도 저는 그때 하나님 앞에 탄식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고달픈 인생은 훗날 야곱의 고백에서처럼,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저들의 아들은 험악한 인생으로 점철됐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야곱은 사랑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 리브가에게 배운 대로, 자신이 좋은 대로 라헬을 원했다. 라헬을 얻기 위해 도합 14년의 세월을 종처럼 살아야 했고, 한두 해만 피신하려던 하란에서의 생활은 무려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저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라헬은 외삼촌 라반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묻었고, 미처 사랑인 줄 몰랐던 레아는 다 늙어 조상의 묘에 안장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1).”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지… 하나만 잠깐 덧붙이자면 야곱의 아들, 리브가의 손자 요셉의 경우는 또 어떠했나? 리브가의 그릇된 사랑으로 야곱은 그의 아내뿐 아니라 아들들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미숙하였다. 유독 라헬의 아들 요셉을 편애했고, 결국 형제들 간의 불화로 번져 요셉의 형들은 저를 죽이려하다 노예로 팔았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선으로 바꾸어놓으셨다. 아버지 야곱의 그릇된 사랑에서 요셉을 강제로 분리시켜 훗날에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다. 그러기까지 저들의 인생살이는 참으로 험악하고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3.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오늘 본문에 앞서 ‘아브람’과 ‘리브가’를 살펴본 까닭은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그와 같은 속성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오늘의 구차한 우리네 인생살이가 어디 하나님 탓인가? 과연 정말 억울한가? 내 부모의 그릇됨이었고 부모의 부모의 잘못이 이어지면서 오늘에 우리의 죄악을 낳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 안의 ‘아브람’과 ‘리브가’를 마주해야 한다. 결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이를 하나님께 돌려 원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탄식했더라면 어땠을까? 축복을 기다릴 수 없어 자기 꾀를 내기 전에 ‘리브가’가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어땠을까?
오늘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방종과 해이함을 낳고, 이는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전가된다. 오늘 우리의 안이함과 무책임함이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인간성은 파괴되고 있다. 지구는 인간으로 인해 병들었고, 오염된 환경은 번번이 전염병을 창궐하게 하고 있다. 문란한 성적쾌락과 자극적 유희가 아이들의 영혼을 좀 먹고, 일련의 ‘n번방’ 사태에서 판매책의 다수가 10대들이라는 데 충격적이다. 그럼에도 ‘코로나19’에도 젊은이들은 클럽으로 몰리고, 나라와 나라는 서로를 반목하고 이간시킨다. 그로 인해 죄의식은 없고 고통은 가중된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오늘 우리는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원론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나오는 말
기도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3-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를 생각하사’ 비록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나 우리는 주의 자녀입니다. 주가 택하신 자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이와 같은 고통과 절규에서 눈을 뜨고 주를 바라게 하소서. 행여 우리의 고통이 길어져서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고, 우리를 보고 있는 원수들이 끝내 회복할 수 없다고 우리 영혼을 보고 자신들이 이겼다고 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안 믿는 사람들처럼 흔들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대적이 기뻐할까 봐도 두렵습니다.
찬송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5-6).”
우리가 이 땅에서는 저들과 다를 바 없이 고통 중에 절규하고 탄식하나, 우리는 그것으로 주를 바랍니다. 주를 찬송합니다. 오직 우리는 주의 사랑을 의지할 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나에게는 주의 은덕입니다. 우리는 주의 구원만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아멘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5편 /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 (0) | 2020.05.01 |
---|---|
시편 14:5-7 / 그들, 가난한 자 (0) | 2020.04.24 |
시편 12편 / 안전지대 (0) | 2020.04.03 |
시편 11편 /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0) | 2020.03.27 |
시편 10:17-18, 애 3:33 / 하나님의 본심 (0) | 2020.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