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2 주일
시편 25편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5: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들어가는 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를 내포한다. 가령 성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 성경의 말씀은 은유이면서 실제다. 이는 우리가 ‘예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는 바울의 고백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하신 말씀과 이어진다(마 16:24). 곧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이야기는 누구에게 읽혀져야 하는 편지다. 들려지는 이야기다. 씹히고 뜯기고 으깨어져 진액이 흐르는, ‘예수의 살과 피’ 곧 ‘떡과 포도주’가 된다. 그래서 지혜자는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하였다. 그렇듯 우리 사는 ‘모든 이야기’는 동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다 생겨난 일도 아니다. 읽혀져야 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성경의 언어는 은유적이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의 지혜로 감당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우리는 다 알 길이 없다(엡 3:18-19). 그래서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이를 억지로 풀어서는 안 되고, 임의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우리 안의 놀라운 증거는 다 몰라도 잘 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기라도 비록 그 엄마의 키와 학식과 특기와 성향을 다 몰라도 엄마가 엄마인 것을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놀라운 ‘비밀의 경륜’이 있다. 오늘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행위 가치’와 ‘존재 가치’
우리는 서로를 대할 때 ‘행위 가치’로 판단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결과를 예측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추론하는 데 있어 가정치를 두고 ‘축적된 행위-결과’들을 놓고 판단한다. 성경도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곧 우리는 행위로 믿음을 가늠할 수밖에 없으나 행위로만은 율법주의가 되기 쉽고, 믿음으로만은 무미건조한 경건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하나다. 어느 것도 버릴 수 없고, 먼저이고 나중은 없다. 그래서 지혜자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즉 행함과 믿음의 근거는 ‘주를 경외함’에 있고 이를 오늘 시편의 표현으로 가져오면 주를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나에게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즉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행함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다. 이 지혜는 생각의 정도로써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진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생각과 마음은 행위보다 앞서지만 존재가 먼저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도 존재보다 앞서지 못하다!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증명하셨다(눅 15:19-32). 곧 존재보다 행위에 가치를 두고 있던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아버지는 큰 아들 또한 ‘존재 가치’로 마중 나가 영접하시며 이끄신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 당장은 다 알 수 없는 것 같으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1. 주를 우러러보는 자들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영혼이 온전히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길은, 주를 우러러보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1).” 그러할 때 나타나는 우리 삶의 증거를 시인은 뒷받침한다. 첫째, 주를 우러러볼 때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를 의지한다.’ 둘째, 그러할 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원수를 이길 수 있다.’ 셋째, 이로써 그 어떤 ‘수치도 당하지 않는다.’ 누구로부터도 판단 받지 않고, 스스로도 정죄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고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2-3, 빗금은 시적 운율로 보아 임의로 나누었다).”
2.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이를 위해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 다 알다시피 ‘도’와 ‘길’은 같은 의미로, ‘마땅히 지켜야 할 이치’다. 우리에게 성경이다. 이를 열어 보이신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 8:17, 12:2).” 곧 우리에게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이 ‘비밀의 경륜’을 알게 하셨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그런데 어떨 때는 선명한데 어떨 때는 안개 속 같이 희미하다. 그럼에도 믿어지니 우리의 믿음이 곧 ‘신비로운 비밀’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이를 오늘 시인은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
3. 주의 선으로 나의 허물을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의 선은 하나님이시다. 이를 우리는 가늠할 길이 없다. 이에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만이 필요하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곧 누구도, 무엇도 선을 이룰 수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자, 선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기도는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뿐이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7-8).”
4. 주의 정의로 지도하소서
정의는 ‘바른 의의’다. 의의는 사물이나 사상, 행동의 가치다. 곧 사물의 뜻이다. 옳고 그름이고, 선과 악의 기준이다. 오늘 시편은 그와 같은 정의를 구하는데, 그러기에 앞서 ‘온유한 자’를 앞세웠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함이란 무얼까?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인데,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온유한 자로 사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미움과 반목과 증오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온유한 자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는 어떤 자일까?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이다. 쉽게 말하면, 말씀 붙들고 자신을 복종시키며 사는 삶이다. 그러할 때,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돌보신다(10). 그러려니 자꾸 부대끼고 그래서도 우리는 더욱 주를 우러러본다.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5. 주의 친밀하심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다
이번 구절의 말씀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13).” 우리의 온유함은 인위적으로 덕을 쌓고 인성 교육을 더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를 경외함으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12).” 우리가 잘 알든 모르든, 싫든 좋든, 우리로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강권함이 있다. 친밀함이란 그런 것이다. 친절함과는 다르다. 타인이면 친절함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게 내 가족이고 자식이면 그저 친절함으로 그칠 수만은 없다. 그래서 친밀함은 때로 억지스럽고 강압적이며 강제적이다. 가만 보면 ‘친절한 타인’으로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있고, ‘친밀한 성도-하나님의 자녀’로 교회를 다니는 교인도 있다. 그 차이는 엄연하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4).
6. 주를 바람이 나의 일상에서 나타난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것처럼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으나 돌아서기 무섭게 파고드는 현실은 끔찍하기만 하다. 누구에게는 딱딱한 돌이 수두룩하게 박혀있다. 누구에게는 가시엉겅퀴가 한가득 뒤엉겨 있다. 염려와 근심이 찌르고, 아무리 애써도 부술 수 없는 마음의 막힌 담이 문제다. 아, 그러할 때 주를 우러러봄이라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5).” 아니면 다른 방도가 없다! 실제 내 발은 현실에 묶여 얽히고설킨 그물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할 때 우리가 주를 우러러본다는 것은, 태양을 등지고 걸을 때 자신의 검은 그림자를 밟고 걸어야 하는 수밖에 없어 사사건건 나를 정죄하는 것들뿐이다. 남들 시선을 의식되고, 저들의 판단에 일희일비한다. 하지만 태양을 마주하고 걸을 때 우리의 검은 그림자는 등 뒤로 물러난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곧 사는 동안 우리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소리가 아니라, 늘 이를 마주하고 사느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사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들이 취할 바이다. 그래서 시인은 주를 마주하고 그 앞에 내어놓고 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6-18).”
7. 주여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소서
어차피 삶이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 이는 세상도 안다. 그래서 한참 유행인 트롯들 가사나 대중가요 가사들을 보면 대부분이 한에 서러워 인생을 푸념하는 노래들이다. 하물며 우리가 ‘그와 같은 세상’에서 온유한 자로, 주를 경외하며 산다는 일은 다름 아닌 주를 우러러보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된다는 소리다.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시 25:19).” 그러니 차라리 안 믿는 사람으로 저들과 섞여 살면 이것저것 가릴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우리 안에서는 ‘어떤 양심’이 있어, 칼빈의 표현처럼 이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성령은 ‘성도를 견인’하신다. 때로는 그와 같은 친밀함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더 주를 우러러볼 따름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20-22).”
나오는 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곧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그러한 저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 그 존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 중에 죽어주셔야 한다. 하지만 요한의 진술처럼 저는 말씀이시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렇듯 주의 생각은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과 평안을 원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오늘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아직 우리는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주를 경외하는 자, 온유한 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이는 현세의 땅으로 일상의 오늘이면서 동시에 내세에 들어갈 영원히 거룩의 땅이다. 여기 현세의 땅에서부터 주는 우리의 주가 되신다. 그와 같이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는 일상에서도 주의 풍성하신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어떻게? 주를 우러러봄으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 3:17-19).” 이에 오늘 시인의 고백은 우리 영혼을 강하게 붙든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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