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예레미야 16:21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편 52:9
비우고 비워 더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은 관여하신다. 그래서 더욱 은밀하게 또는 간절하게,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고통은 우리에게 참 고백을 노래하게 한다. 이른 아침 나는 글방에 앉아 욥기서를 문득 읽었다. 욥에게 닥친 환난으로 친구들은 설왕설래, 욥도 다를 바 없이 서로들 옥신각신하였는데, 이를 듣다못해 나이어린 엘리후가 한 마디 하는 대목이었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욥 35:9-11).” 잘들 떠들어대지만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에 대해 말하는 이가 없다고 꾸짖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밤에 노래하게 하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밤과 낮을 병행하게 하심과 같이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셨다고 지혜자는 말하였다. 이를 누가 굽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러니 지혜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곧 힘들고 어려운 일이 좋고 평안할 때와 같이 교차로 온다. 그러한 어려운 때, 밤에, <하나님이 우리로 노래하게 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엘리후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좋은 때, 혹은 귀한 것을 선물로 받을 때 누군들 감사하지 않겠나? 값진 선물을 받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여인은 많으나 어렵고 고단한 일이 겹쳤을 때, <그럼에도 당신이 있어 좋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이 노래, 곧 우리로 밤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우리의 고백을 듣고 싶으신 것이다! 맞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는다.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도와주세요, 하는 소리가 나온다. ‘군주들의 힘에 눌려’ 즉 내가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의해 비로소 소리치지만 그럴 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찾고, 그렇게 '그 어려운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 하고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평온하게 있을 땐 모른다. 누군들 솔로몬 같이 낮만 계속 되어지는 것 같은 인생에서 누군들 솔로몬 같지 못했겠나? 밤은 없고 낮만 이어지면, 겨울은 없고 여름만 이어지면 영혼은 게으르고 안이하고 나태하기 마련이다. 그리 애태워 주를 바랄 게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가 저였다. 저의 생은 마지막에 초라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이 무너졌다. 급기야 저가 죽은 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갈라졌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처한 밤에 대하여,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어둡고 습습한 이 날들에 <하나님은 우리로 노래하게 하신다.>는 의미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 하나님은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그러하기를 원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기를 바라시)는 이”시다. 엘리후의 통찰이 귀하게 들렸다. 밤에, 땅의 짐승들은 그저 살아서 살아가는 것으로 족한 줄 알 때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새들은 스스로 자유롭게 나는 것처럼 활개치나 우리를 저보다 더 자유롭고 지혜롭게 하시기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밤을 더하신다! 그 밤중에 노래하게 하신다. 좋고 안이할 때 몰랐던 노래다. 참 고백, 아무리 어떠해도 ‘하나님 사랑해요.’ 하는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온전히 주만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거였다.
진실한 고백은 좋을 때보다 비루하고 형편없이 힘들 때, 서로 더 의지하며 그 의미는 진실하여진다. 종종 어느 부자가 자신의 부를 좇아 사랑을 구하는 이들을 피해 비루하고 천한 상태에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이를 구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때, 밤중에 노래한 것 중에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꼽으라면 단연 하바국의 절실한 노래가 아닐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당시 저들은 애굽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오늘 우리나라가 미국에 기대어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처럼, 그러했던 애굽이 신흥국 바벨론의 무서운 급성장으로 이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제 저 바벨론이 유다민족을 향해 온다. 저들이 닥치면 온 나라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저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16).”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창자가 떨리고 목소리로 말을 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환난 날을 기다리느라 뼈가 다 썩는 것 같고, 몸은 집에 있는데도 떨려 죽겠다. 힘에 부쳐 기력을 잃었는데도, 저의 밤중에 저를 노래하시는 이의 위대하심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다. 비록 개뿔도 없고, 없는 것들 투성이라 비루하기 이를 데 없으나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는 사랑의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척박한 돌산인 줄 알았는데 지하수가 터지듯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는 이 놀라운 노래를, 하나님이니까 하게 하신다. 하나님이시니까 듣고 싶으신 것이다. 이를 우리가 누릴 천국에서 들리는 찬양이다. 이게 어찌 사람이 깨닫고 저의 고뇌와 번민 가운데 찾아낼 수 있는 통찰이겠나?
마침 오후께 누구와 통화를 하다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고, 아침에 문득 그와 같은 말씀을 접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요즘 나의 밤중에 나로 하여금 주를 앙망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인생의 밤은 비로소 참 사랑, 그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과 같이 어려운 시절을 좀 겪었으면 어땠을까? 저의 낮 동안에 저는 밤중의 노래를 알지 못하였다가 다 늙고 노년에 병들어 곧 죽게 되었을 때에야 저는 그저 자신의 세월이 허망하게 다 흘러갔다는 데서 허무한 노래를 하였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것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3-7).” 다들 부러워할 정도의 삶을 살며 못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다가 다 늦어서야 이러한 노래뿐이니, 그 신세도 처량하지만 죽어서도 저의 치세의 결과로 나라가 두 쪽이 난 것이다!
여기에서 상대적으로 그의 아버지 다윗은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이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4-7).” 저는 종말과 연한의 한계를 알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았다. 그 날이 한 뼘 길이만도 못한데서 굳건하니 괜찮다 할 때도 실은 모든 게 허사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이를 주께 아뢰며 각 사람은 그저 그림자 같다는, 헛된 일로 요란을 떨고 조바심을 치며 사는 것이 한심하다는 것을, 역으로 오직 주를 바란다는 노래가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나는 누구에게, 그래서 말씀만 의지하고 그래서 말씀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는 고백을 할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누가 누구의 속을 알겠으며 저를 헤아려 이해할 수 있겠나? 그 마음의 일은 누구도 참여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하는 고백은 아무나의 것이 아닐 거였다. 그리하여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주가 주시는 마음이고 노래이다. 밤중에 하나님은 우리로 노래하게 하신다! 곧 오늘 말씀에서도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백도, 노래도 주가 하게 하시고 들어주셔야 하는 것임을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렘 16:21).” 이처럼 주가 알게 하실 때, 곧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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