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주일
시편 26편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들어가는 말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8-9).”
모두의 하나님이시지만 개인의 하나님이시다. 개인의 체험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를 말씀보다 우선해서도 안 된다. 간혹 개인적인 체험이나 ‘남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 마치 자신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자신은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남에게 강요하려 든다. 하지만 말씀보다 앞서는 그 어떤 경험도 우상숭배일 뿐이다. 세례요한은 이를 경계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바울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다. 모두 자신을 말씀보다 앞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혹은 ‘섭리’에 대하여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다.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원인이 없다. 그 섭리는 ‘오직 자기의 뜻과 은혜’로 하심이다. 원인도 없고, 어떤 과정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새삼 하나님의 뜻이 작동된 것이 아니다.
바울의 증언에서도 보면, 우리는 종종 ‘갇힌다.’ 질병에 갇히고, 가난에 갇힌다. 애써 수고하는 일에 갇히고 실패에 갇힌다. 그러할 때 이를 부끄러워말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복음을 받으라고 한다. 이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갇힌 것도 놓인 것도 우리의 수고와 결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서의 고난은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이 아니다. 복음으로 인한 갇힘이고 놓임이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다. 곧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것이 주의 뜻이요, 섭리다(딤후 1:8-9).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원리를 깨닫게 하신다. 표현된 것으로만 보면 자신이 옳다고 하는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다. 바울의 증언과 같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저가 그만큼 자신은 자신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오직 주 앞에 서면 판단 받을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주가 우리의 대언자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어서 바울의 증언을 더하면,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의 죄를 주께서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신 죄를 심판장이 판단하신다면 우리를 판단하심이 아니고 그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판단하시는 게 된다. 이를 이해하고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한 편의 시를 나누어보자.
1.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신다(1-7)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1-2).”
문맥적으로도 봐도 나의 완전함이 여호와를 의지함에서 온다. 앞서도 밝힌 바,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뜻과 양심을 단련하신다. 즉 죄로 인해 가장 먼저 오는 징계는 가책이다. 죄책감이다. 수치심이고, 부끄러움으로 처음 사람 아담도 하나님이 뭐라 하시지도 않았는데 그늘 깊숙이 숨었다. 단련한다는 것은 시련이나 체험을 통해 굳세어져 가는 것이다. 강한 쇠는 불에 달구어지는 횟수와 쉴 새 없이 두들겨대는 망치질에 의해 강해진다. 이는 엄연한 고통이고 시달림이다. 넌더리나는 우리의 일상이다. 믿음을 무슨 요술봉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작 스스로의 믿음을 의심하지 못한다. 단련됨의 부정적인 의미는 닳고 닳아 무뎌진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선한 양심의 가책이 거듭되면서 더는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비례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어서 간구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3, 4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믿음이 곧 의지다. 그저 믿음으로 끝이 아니다. 지난 주일에도 나누었던 것처럼 믿음은 곧 행함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오늘 우리를 단련하시는 까닭은,
첫째, 진리 중에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둘째, 허망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셋째,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음 시를 이어서 보면 왜 그런지,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5절로 7절까지의 언급은 한 마디로, 우리 행함의 실제 모습이다. 사람으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더는 죄를 미워하나 여전히 죄로 빠질 때가 있는데, 이를 잘 앎으로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겠다고 한다. 전에 즐기던 모임이다. 친구들이고 함께 어울리던 관심이다. 이를 의식적으로 미워하여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않겠다. 행여 그 자리가 출세와 성공을 보장한다 해도! 이를 분별하기 위해 ‘손을 씻고’ 즉 날마다 돌이켜 주께 회개하고, ‘주의 제단’ 곧 예배의 자리에 ‘두루’ 있으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겠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나의 삶 가운데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그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증인으로 살겠다는 소리다. 그러할 때 앞서 먼저 경계한 것이 개인의 남다른 체험이나 은사다. 이를 부각시켜 자랑으로 삼으면 주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내세우려는 심리가 내재되는 것이다. 가령 쉬운 예로 ‘내가 출세하고 성공하면 주를 위해 살 거야!’ 또는 ‘지금 이 고비만 넘기면 주께 헌신하고 봉사할 거야!’ 하는 식의 조건부적인 회피가 그럴듯한 신앙으로 작동하는데 ‘어린 소자에게 하지 못하는 선행은 모두가 거짓되다.’ 또한 ‘오른 손이 다 아는 왼 손의 선행은 모두 위선이다.’ 거짓은 얼마나 교묘한가하면,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그들이 어떻다는 것인가? 먼저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라 한다.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이다.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도 자기 편으로 그 뜻에 동조하실 거라 확신한다. 거짓의 놀라움은 이처럼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 자신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인다. 그럴 수 있다고 장담한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우리가 맺어가는 성령의 열매에서도 그러므로 절제를 맨 마지막에 두셨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곧 절제 없는 사랑은 자기애에 지나지 않고, 절제 없는 희락은 쾌락주의에 빠지게 하고, 절제 없는 화평은 진리와 무관한 평화주의자가 되게 하고, 절제 없는 오래 참음은 극기와 인내로 자기 과신이 되게 하고, 절제 없는 자비는 자기만족에 겨운 선행으로 이어져, 절제 없는 양선과 같이 죄를 온전히 구별하지 못하게 한다. 절제 없는 충성은 무자비한 원리원칙주의자가 되게 하고, 절제 없는 온유는 흐리멍덩한 안이함으로 태만을 가져오고, 절제 없는 절제는 오히려 자기만족으로 하나님의 섬긴다고 착각하게 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주의를 주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모든 것 위에 주의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
2.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한다(8-12)
오늘 시편의 후반부는 그러므로 시인은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겠다고 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8, 9절 말씀은 다음 장인 27장에서 더 한 층 목소리를 높이는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이는 우리 인생의 결론이면서 오늘을 사는 존재의 이유다. 아무리 세상은 완악할 따름이라 해도, ‘주께서 나를 속량하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0, 11절에서 ‘속량과 은혜’를 구하는데, 이는 내가 이 땅에서 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주를 송축하기 위함인 것임을 12절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이는 곧 ‘주의 속량과 은혜’인 것임을 강조한다.
나오는 말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잠 3:21).”
우리의 지혜란 주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떠하든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저는 선하시고 긍휼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에게 주의 뜻을 알게 하신다 해도 그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그래서 오직 스스로 근신하고 주의 말씀을 눈앞에, 주의 영광이 머무시는 곳을 사랑하는 것만이 참 지혜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유가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담아낼 수 없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
우리는 다만 주의 판단 앞에 선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이를 알면 알수록 더는 사람들의 판단,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시선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고로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오직 주만이 우리를 판단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대언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다. 에스겔은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비유하였다.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5).” 미가는 측량할 수 없는 바다와 같다고 하였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스가랴는 참 신비로운 샘물 같다고 하였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그러므로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삼하 22:36-37).” 오직 주만이 그리하실 수 있다. 자, 그런 우리가 주의 판단 앞에 선다. 우리는 담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만큼 내가 남다른 체험과 남다른 은사를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시고, 이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언제든 우리를 대언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로움 때문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사도요한의 증언으로 읽고 이해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담대히 주께 고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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