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35:24-28 / 은혜를 입은 자

전봉석 2020. 11. 13. 14:26

20201115 주일

 

 

시편 35:24-28

은혜를 입은 자

 

 

35:2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5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6 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35: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35:2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들어가는 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오늘을 사는 모두 생명은 죽음을 향한다. 생명이 있는 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그럼에도 공교롭게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바라나 주 앞에 나오기는 싫어한다. 은혜의 복은 원하고 연단은 싫어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은혜는 매 끼니와 같이 날마다 받아야 한다. 배불리 먹었다고 굶고 사는 사람 없고, 지난해에 풍작이었다고 올해 농사를 접는 농부는 없으며, 만선으로 돌아온 어부가 더는 출항을 포기하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은혜는 더 큰 은혜를 갈망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오늘 본문을 열기에 앞서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은 죽음에 이르고 사는 동안 연마하였던 은혜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 ‘잔다’하는 이 표현에는,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다시 깨어날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즉 죽음으로 끝이라 여기거나, 그 혼이 구천을 떠돈다거나, 혼백이 제삿밥은 먹으러 온다거나 하는 따위의 헛소리에 놀아나지 말고,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슬픔을 무마하려 지어내는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슬픔이 주는 유익, 질병이 갖는 은혜의 영역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슬픔을 슬픔답게 애곡하고, 질병을 의미 있게 맞이해야 하는 까닭은 고통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약속된 은혜가 있음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었고, 평소에 연마한 이와 같은 은혜를 가지고…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래서 은혜도 연마가 필요하고 이와 같은 단련의 유익이 무엇인가 살펴보고 들어가려 한다.

 

 

1. 은혜를 연마하는 방법

 

첫째, 흔들리지 않는 은혜는 경건과 섬김으로 연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둘째, 더욱 큰 은혜를 위해 우리는 겸손으로 연마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셋째, 겸손을 통한 은혜로 영광을 기업으로 받는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 3:34-35).”

 

넷째,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 순종으로 연마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2. 은혜를 연마하는 자의 유익

 

첫째, ‘그런즉’ 깨어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23).”

 

둘째, 미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셋째, 믿음을 연마함으로 사랑을 더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3. 본문이해

 

1연. 하나님은 나와 다투는 적과 다투신다(1-8).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1).”

 

가장 대표적인 은혜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투를 대신 치르시고(2), “나는 네 구원이라.” 하시며 우리의 영혼이 듣게 하시고(3), 우리를 해하려던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낭패를 겪게 하신다(4). 그렇게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결정적인 증거이며, 이를 알고 있던 다윗은 당당히 골리앗과 맞섰다(삼상 17:45).

 

2연. 은혜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공급된다(9-16).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10).”

 

현실의 가난과 영적인 가난은 연관성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다(마 5:3).” 이와 같은 이치는 하나님으로만 부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풍요롭고, 궁핍을 모르는 사람은 굳이 평소에 하나님을 찾을 일이 없다. 심령이 가난하지가 않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우신다고 하였다(시 113:7-8).” 이는 개념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다. 야고보 사도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즉 저들의 가난과 궁핍이 하나님을 더욱 절실하게 구한다. ‘그 기도는 반드시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오늘 시편에 축약된 은혜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

 

3연. 은혜 받은 자의 권리(17-28).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24).”

 

우리는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와 같은 기도도 할 수 있다. 마치 엄마에게 이르고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는 아이처럼, 아주 당당하게 그럴 수 있는 은혜의 자리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인데, 은혜는 담대하게도 그 억울함을 숨기지 않고(시 35:17, 19), 주의 공정하신 재판을 요구하기도 한다(18). 바울도 이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곧 은혜를 받은 자들은 ‘다 함께’ 서로의 재판을 기뻐할 것이다. 오늘 시편의 찬송은 바로 그와 같은 은혜의 자리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시 35:27).” 그리하여 오늘을 사는 동안 매일매일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이것이 은혜의 연마이고 단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른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나오는 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날마다 더하시는 은혜를 소홀히 할 때, 오롯이 그 괴로움은 자기 몫이 된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슥 5:3).” 결국 자기가 썼던 글처럼, 행하였던 대로 땅 위에서나 땅 아래에서 받을 몫이다. 만족을 채우려고 그렇게 애써 평생을 죽어라 하고 일만하다, 돈만 좇다, 쾌락을 구하다, 이내 죽음이 당면하면 과연 저들은 무엇으로 그 극한 두려움과 고통을 감당할 것인가? 과연 저들 입에서 다음과 같은 은혜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와 같은 고백은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사람 따위, 저들의 잘되고 흥한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늘 시편은 “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시 35:5).” 곧 저들의 결말을 알고 있다. 죽음 너머의 소망은 은혜를 입은 자의 것이다. 결코 모두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는 인내를 통해 은혜를 연마한다. 은혜를 배움으로 감사하는 심령의 노래가 울려난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닌 하나님이 더하시는 은혜의 위로를 배워가는 것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 예수님도 이를 본으로 삼게 하시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이는 우리의 심령이 가난함으로 천국을 가졌고(3), 주의 은혜로 더욱 더 “온유한 자”로 변화하여 “땅을 기업으로 받”으며(5), 기꺼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은 주의 은혜로 “배부를 것임이”다(6). 남을 위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로 “긍휼히 여김을 받”고(7), 이를 연마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로 “하나님을 볼 것”이다(8). 우리는 이내 “화평하게 하는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9). 그러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기 때문이다(10).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1).”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