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36: 5-12 / 주의 인자하심

전봉석 2020. 12. 4. 10:38

 

 

20201206 주일

 

 

시편 36: 5-12

주의 인자하심

 

 

들어가는 말

 

지난주일 우리는 ‘죄는 죄다’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끔찍한 명제를 진리로 다루었다. ‘틀린 것’이 서로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죄는 우발적인 실수나 질병일 수 없다. 혼탁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해야 한다(단 1:8). 이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타협할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기준이 된다. 아닌 건 아닌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이단이다. 말씀을 토대로 말하건대, 사람 중심의 사회는 이단이다. 평화주의는 이단이다. 종교화합은 이단이다. 율법과 은혜를 이분화 하는 주장은 이단이다. 율법만 강조하는 것은 이단이다. 은혜만 내세우는 것은 이단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나 ‘선택권’은 사탄이 도안한 가장 기막힌 걸작이다.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하지 않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곧 우리의 병든 영혼을 알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다. 다윗은 절규하기를,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이처럼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면 은혜도 은혜로 알 리 없다.

 

1. 죄는 죄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 36:1).”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 죄다. 전에는 우리도 그러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2. 죄는 자긍한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 36:2).” 자긍은 자신에 대한 긍지다. 오늘 날 우리가 서로를 부추기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위로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긍심을 가지라는 것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52:7).”

 

3. 죄는 지혜를 소멸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시 36:3).”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이다(잠 1:7). 많은 교회나 이단이 다들 성경공부에 열을 올리지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정작 예수를 구주로 삼지 못한다.

 

다시 직언하자면,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여느 종교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아, 이를 실천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이단이다. 성경은 엄연히 하나님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 아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다르다. 내가 대통령에 대해 책으로 안다는 것과 직접 마주하고 사는 일과는 엄연히 다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곧 실제의 실재는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일’에서 사는 것이다(10:1).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를 안다는 일은 영생을 사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영생에 속한 하루다. 어느 때보다 우리의 지식은 팽창하였으나 우리의 지혜는 소멸되어가고 이를 알지 못한다.

 

4. 죄는 악을 계획하고 즐거워한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시36:4).” 누워 궁리하며 꾀하는 모든 일이 악하다.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않는다. 죄는 돈이 되고, 돈은 권력이 되고, 권력은 힘을 보장한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를 순화하여 ‘문화’로 놓고, ‘관례와 관습’에 따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으로 받든다! 사탄은 이 기발한 발상으로 창작하고, 히트를 쳐 벼락부자가 되게도 한다. 돈이 돈이 됨으로,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잠 4:1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에 대하여, 이 불가능한 사실을 두고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인자하심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5)”

 

하나님은 죄를 용인하실 수 없다. 죄의 값은 엄연히 사망이다. 누가 대신 물으려면 죄 없는 자가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영원하신 존재이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셔야 했다. 그럴 바에 영으로 존재하는 ‘타락한 천사’를 구원하시는 게 훨씬 수월하셨을 테고, 아예 저의 전능하심으로 갈아엎어 없었던 일로 하심이 더더욱 쉬웠을 텐데… 굳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것이 사람이다. 누구보다 이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구원의 동력은 사랑 때문이시었다.

 

2. 하나님의 의로우심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6).”

 

모름지기 심판은 공정하고 판단은 정의로워야 한다. 죄인은 재판을 꺼리고 의인은 심판을 바란다. 그러기까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긍휼과 은혜로 인함이다.

 

3. 하나님이 구원하심(10-12).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10).”

 

‘주를 아는 자’를 구별하심인데, 우리가 ‘안다’는 것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요한의 진술을 보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곧 세상은 알지 못하나, 우리는 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정리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 이 앎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되게’ 하신 이의 것으로 우리로 주를 영접할 수 있게 하신다.

 

곧 오늘 시편의 기본 단서도 뚜렷하다.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베푸”신다는 것! 예수를 한낱 목수의 아들로 알았던 유대인들은 당연히 저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었다. 오늘도 예수를 훌륭한 스승으로 알고 저의 삶을 따르며,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저들의 삶은 청렴하다. 앞장서서 구제하고 헌신하며 봉사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냉철하게 말하길,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정리하자면,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은 결코 저들의 것이 아니다. 앎으로 구주로 영접하고, 영접함으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즉 예수를 선생이나 의인으로, 십자가를 희생이나 순교로 여기는 한 이와 같은 지혜는 어림없는 진리다. 나의 구주, 나의 통치자, 나의 주인으로 삼는 자의 삶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무슨 일로 밥벌이를 하고 살든 우리의 생활의 주인은 주님으로 주의 일로 여길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의 이 권세는, ‘되는’ 권세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취득하는 자격이 아니다. 자녀가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닮는 것이다. ‘되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지 내가 애써, 누가 억지로 그리 ‘하는’ 게 아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썼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곧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심을 위해 존재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즉 구원은 우리가 원해서 하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의로움으로 그리 되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일로써 말이다. 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곧 우리가 들어갈 영생의 나라에서 우리가 하는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찬송이 되는’ 일, 우리로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다.

 

 

나오는 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오늘 시편은 마무리 부분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고 있다. 첫째, 교만을 경계하라는 것.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11).” 둘째, 악한 일에 주의하라는 것.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12).” 왜냐하면 그 결과로 우리는 오늘을 살고, 그 결과로 우리는 나중을 살아야 한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며 실제다.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의 본질-교만과 악행에 대한 이사야의 냉정한 판단을 유추해보자.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첫째, 우리는 생각부터가 악하다. 악을 행함으로 악해지는 게 아니라, 생각부터가 악함으로 악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그 삶은 사는 내내 황폐와 파멸이 따른다. 사는 게 팍팍하여 은혜가 없다. 믿는 자로 살면서도 그런 삶이 허다하다.

 

셋째, 그는 행함에 있어 정의가 없다. 남들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들 그러고 사는 세상을 본다.

 

넷째, 그와 같은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든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교만은 늘 스스로가 옳다 여긴다.

 

다섯째, 그 결과는 그의 안에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남부러울 게 없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느라 사는 게 늘 생지옥 같다.

 

죄는 죄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 그 권세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앎으로 주의 은혜로만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게’ 하시는 이의 인자하심만이 우리로 평안하게 하실 수 있다. 이를 알면 알수록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유념하게 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