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36:1-4 / 죄는 죄다

전봉석 2020. 11. 27. 09:52

 

 

20201129 주일

 

 

시편 36:1-4

죄는 죄다

 

 

36:1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36: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36:4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들어가는 말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암 9:10).”

 

오늘 우리는 더욱 엄숙하게 말씀을 접해야 한다. 죄는 엄연히 죄다.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틀린 것’을 서로 ‘다른 것’이라 하고, 죄를 질병이라 하면서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리라.” 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면 누구는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구약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소린데, 물론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자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율법이 없이는 은혜를 받을 자도 없다. 이는 우리가 율법으로 자신의 끔찍한 죄성을 알고, 이를 통회하고 자복함으로 구원을 바라게 된다. 그런데도 시대정신에 맞춰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주의 백성’이 있다면 “화 있을진저!” 그런 주장에 대해 바울은 일갈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얼마 전, 일본인 ‘사유리’는 ‘비혼임신’을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졌다. 이를 불법이 아니라 하여 저의 ‘열린 정신’을 높이 지지하는 분위기다. 저는 미국인 정자를 받아 일본에서 출산했다. 7년 전 ‘허수경’도 ‘비혼임신’을 공개적으로 한 바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개인의 결정권’을 높이 존중하면서 소수자의 선택을 ‘용기’로 둔갑시켰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면 종교적 광신자로 몰리거나 편협한 인간으로 매도된다. 교회에서도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로 우리의 입장을 번복하는 분위기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종교화합’도 가능하다. 그 어떤 자기선택도 부정할 수 없다. 더는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해야 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음식과 포도주일 뿐인데, 하고 저마다 허용할 때 다니엘은 다른 신을 숭배한 제물로 이를 규정하였다. 다들 ‘요가’는 운동이라 하고, ‘뉴에이지 음악’은 정서적인 안정을 주는 음악일 뿐이라 한다. 단언하건대 ‘사람 중심의 사회’는 이단이다. ‘평화주의’는 이단이다. ‘종교화합’은 이단이다. ‘율법과 은혜를 이분화 하는 주장’은 이단이다. ‘율법만 강조하는 것’은 이단이다. ‘은혜만 내세우는 것’은 이단이다. 율법과 은혜는 하나다. 율법은 구원의 초본이고,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죄는 죄다. 이를 개인의 ‘행복추구권’으로 덮어, 오늘 날 ‘민주주의’는 기형적인 ‘자유주의’를 낳았고 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우선하는 ‘종교의 자유’를 내세운다. 선진화된 나라일수록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그 어떤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좋아함으로 관계하고, 결혼 없이도 아이를 낳을 권리가 있고, 임신한 아이를 ‘자기 결정권’에 따라 낙태할 권리도 주장한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이단이며, 그 어떤 우상숭배보다 악하다. 교회에서도 성경의 ‘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그럼 우리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사람들의 행복을 도모한다.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 위로와 격려로 복음을 전락시켰다. 아이를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안 돼!’, ‘옳지 않다!’ 제지하는 것을 나쁜 교육으로 규정하고, 아이에게 매를 들면 야만적인 행태라고 입을 모은다. 이와 같은 ‘사람 존중의 교육’을 성경은 단호하게 일갈한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선진화된 교육은 일찍 성교육을 시켜 콘돔 사용법과 피임방법을 가르침으로 인해, 오히려 미성년의 임신율은 높아졌고, 사생아가 늘었으며, 미혼모는 급증하고, 십대들의 성병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고, 자살률이 급증하였다. 이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우리 사람이 본래 얼마나 악한지를 부정하는 데서 오는 폐단이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0-11).” 그와 같이 선진화된 교육 덕분에 ‘캥거루족’이 늘고, 의지박약한 청년층이 두터워졌며, 부모를 부양하는 세대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틀린 것을 틀린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죄를 죄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자신들의 꾀에 자신들이 중년이 지나 고통을 당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죄를 죄로 알지 못할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곧 자신의 병든 영혼을 알지 못함으로 회개를 가벼히 여기고, 회개가 없음으로 은혜를 잃어간다. 그래서 말씀은 절규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2-3).” 실제 우리 앞에 놓인 죄의 심각성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때 율법을 배제하게 되고, 이 땅에서의 승패로 은혜를 가름한다. 아,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여기서 ‘말할 수 없는 은사’는 모세가 받은 율법이다. 율법이 없이 죄도 없다.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함인데, 평생을 믿는 자로 살면서도 은혜를 은혜로 알 수 없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때마다 사탄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이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오늘 본문 시편 36편을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로 두 번에 나눠 다루고자 하는데, 오늘은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죄는 죄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 36:1).”

 

빛이 비추되 어둠이 이를 알지 못했다. 우리도 다를 게 없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곧 우리는 이제 죄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안다. 그 죄가 늘 우리 속에 있다.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앞에 항상 웅크린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우리 속에는 있다. ‘인생 다 그렇지 뭐!’ 하는 소리에 우리는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도 자주 ‘다 그렇지 뭐!’ 하며 죄를 죄로 보려는 노력을 않는다. 심지어 서로를 부추겨 ‘너만 그러 거 아니야! 네 죄가 아니야!’ 하고 서로 ‘위로’하는 정도로 말씀을 전락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 5:24).”

 

2. 죄는 자긍한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 36:2).”

 

자긍은 자신에 대한 긍지다. 자기주도적인 교육이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복음을 오염시킨다. 말씀 중심의 삶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만든다. 그로 인해 우리 안의 빛은 선한 양심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서로의 죄를 견주어 자신을 파악한다. ‘저 사람보다는 낫지 뭐!’ 하는 식으로. ‘그럴 수 있어! 네 잘못이 아니야!’ 하면서. 거기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자긍함이란 스스로 높이 사는 교만 그 이상의 사악이다. 하나님을 자기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3. 죄는 지혜를 소멸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시 36:3).”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의 기준을 파기하다 보니, 지식은 넘치는데 지혜는 소멸된다. 지식은 우리가 배움으로 아는 것이고, 지혜는 하나님이 계시로 열어 보이심이다. 배움이 짧아도 인생을 통찰하는 사람도 있다.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들 가운데 성경을 문자로, 선포를 설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을 선호함으로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진리는 설화가 되고,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진리는 신화가 된다.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단언하건대 예수의 가르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이를 주장하는 이교도가 <예수교>다. 저들은 예수처럼 살려고 하고, 이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다.

 

다시 직언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여느 종교와 같이 <가르침을 받고, 깨달아, 이를 실천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모두 이단이다. 성경은, 오히려 율법은 어느 누구도 그리 살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이를 지켜 완전할 수 없다. 가령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누구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 수 없다. 성경도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곧 율법은 모형이고, 실재에 따른 그림자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0:1).”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잠 1:7), 구원함을 받는 영생은 예수를 아는 지혜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4. 죄는 악을 계획하고 즐거워한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시36:4).”

 

저들의 하루는 침상에서부터다. 누워 궁리하며 꾀하는 것이 일상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고유문화’다. ‘관례와 관습’이며 ‘오랜 전통’이다. 이를 순화하여 죄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악하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잠 4:16-17).” 오늘 우리 사회구조가 그리 되었다. 넋풀이, 한풀이 춤과 노래가 우리나라를 알리는 문화유산이라 떠든다. 제례와 의식에 쓰이는 문양과 표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 그에 비해 소소한 ‘접대 문화’, ‘사회 문화’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수가 되었다. 믿는 자로 각종 의례를 거절할 수 없는 구조다. 산악회든 무슨 모임이든 제사상을 차려 돼지머리에 돈을 꽂고 술잔을 바친다. 차례음식을 공들여 준비하고 그 앞에 절한다. 그런 걸 ‘다 그래!’ 하면서 허용한다. 부추겨 격려와 위로로 말씀을 호도한다. 교회의 역할이 암울한 시대에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라 여긴다. 아,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나오는 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로, 우선 ‘죄의 심각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잠깐 정리하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죄는 죄다. 틀린 것을 틀리다. 아닌 것은 아니다. 틀린 게 다른 게 되고 아닌 게 기다려준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죄는 자긍한다. 스스로 괜찮다, 옳다 여기는 한 죄는 더 이상 죄로 여겨질 수 없다. ‘다 그래!’ 하고, ‘네 잘못이 아니야!’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빌미로 성경을 희석하면 더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결코 사람중심의 사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 율법으로 우리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 예수를 본받아 완전한 의를 이루고 산 사람은 없다. 모세도 다윗도 심지어 바울의 절규는 우리의 가슴을 후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이렇게 단호히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목사는 의롭고 완전하다고 보면 헛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누구보다 바울의 절규로 오늘도 애통하며 주의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성경을 상고하면 할수록, 율법을 알고 바르게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죄에 부딪칠 뿐이다. 그러니 길은 하나뿐이다.

 

넘치는 은혜,

내 모든 죄 덮는 은혜 주께 있사오니,

치유 샘 넘치게 부으사

내 속까지 깨끗이 씻어주옵소서.

생명샘이신 주님을

값없이 마시게 하옵소서.

-찰스 웨슬리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성경을 알면 알수록, 예수의 가르치심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국 주의 긍휼하신 은혜,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면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실감할 뿐이다. 죄는 지혜를 소멸한다. 그리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저의 말씀이 우리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끄신다. 복음은 결코 설화나 신화가 아니며, 상징이나 은유로 전부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말로 보이심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끝으로 죄는 계획적이고 악의적이다. 어쩌다, 우발적인, 질병으로 죄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극단적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막 9:43, 45).” 죄는 질기고 끔찍하며 교묘하고 악랄하다. 그러니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