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6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편 79:9
잠을 설치고 깼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겼다. 아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다. 영하 17도를 가리키는 추운 날씨였다.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염려하다, 그러느니 일찍 일어나 앉아 말씀을 끌어당겼다. 누구는 그래도 감사한 게 친정엄마 고관절수술이 잘 됐다며 안도의 문자를 보냈다. 둘러보면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이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오늘 마태복음 9장에 기록된 한 날의 상황도 수만 가지의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를 오늘 말씀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하는 한 구절로 축약하고 있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 동네로 가셨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셨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왜 저를 ‘작은 자’라 칭하셨을까? 중풍으로 병상에 누운 일이 저에게는 큰일이겠으나 그렇지 않음을 뜻하시는 것 같다. 이를 오늘 시편의 진술로 이해하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하나님은 그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해, 주의 이름을 증거 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사하신다. 이를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알고 주의 영예를 전할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복음서의 저자 마태는 이를 증거 하기 위해 ‘작은 자여’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표현을 놓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전혀 엉뚱한 사안을 문젯거리로 삼는 무리가 있었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그러니까 중풍 병자가 주 앞에 나왔고, 이를 두고 ‘일어나라.’ 하시기보다 ‘죄 사함을 받았다.’ 하시는 것을 논쟁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예수님은 아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들으라는 것은 듣지 못하고, 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게 악하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란 하나님 없이 드는 모든 사고다. 하나님 없는 판단이고 기준이다. 성경이 자주 언급하시는 세상도 실제는 그러하다. 예수님은 저들의 관점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저들의 알지 못함, 알 수 없음을 간파하셨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곧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고 저를 돌려보내셨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쉽게 감동하고 영광을 올리는 무리들도 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저들의 영광은 일시적이며 즉흥적이다. 다분히 종교적이고 미신적이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그 곳을 떠나셨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그리고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저는 세리로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다. 대놓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자이고, 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인물이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같이 음식을 잡수셨다. 그 자리에 동료들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저들은 마치 문젯거리를 찾아 시비를 일삼는 자들 같다. 정작 본질과 현안에는 관심이 없고 정죄하고 비판할 꼬투리만 찾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응수는 일격을 가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저들은 거기 모인 ‘죄인’들보다 온전하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한 한 발짝도 예수께 나아갈 수 없다. 그 간격은 몇 광년의 거리보다 멀다. 그런 저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런 기현상은 굳이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나름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독설을 퍼붓고 정죄하는 저들이 정작 자신들의 금식하는 종교 행위를 바리새인들과 같은 선에서 묶어 제자들의 금식하지 않음을 눈여겨보다 하는 소리였다. 보면 꼭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름은 믿는 자로 교회도 출석하고 신앙도 좋다 자부하면서 필요할 때면 이쪽이고 아니면 저쪽에서 공격한다. 예수님은 그 또한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때가 서로 다른 것처럼 같을 수 없는 무리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는 묵상의 길이를 더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6-17).” 이는 곧 새 생명이 옛 생명과 같을 수 없다.
그때 한 관리가 와서 딸의 죽음을 알리고,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고 믿음으로 청한다. 예수께서 일어나 저를 따라가실 때,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진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 구원은 이처럼 즉각적이고 믿음으로 즉시 이뤄진다.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저들이 성품이나 성향, 기질이나 소속이 어디냐를 묻지 않으셨다. 무얼하며 살았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알려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 믿음으로다. 이 믿음은 간절함으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의 방패다. 딸애가 죽었다. 아버지의 절박함을 상상한다. 12년동안 하혈을 하며, 여성으로서 수치스러워하고 몸이 피곤한 이를 상상해본다. 체면 차릴 때가 아니다. 믿음은 절박함의 산물이다. 느긋하고 여유있게, 의연하고 근엄하게 얻는 깨달음 따위가 아니다.
예수께서 관리의 집에 도착하여 ‘떠드는 무리’들을 물러가게 하셨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들은 이 말씀에 비웃음뿐이다. 그러든 말든 무리를 내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죽었던 소녀가 자다 일어난 것처럼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예수님은 서둘러 거기를 떠나셨다. 그때 또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나아오는 저희에게 물으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저들이 대답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셨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지만 그들은 나가서 떠벌였고, 예수의 소문은 금세 퍼졌다. 복음과 소문은 다르다. 소문으로 다니는 교인들도 부지기수다. 정작 자신들은 혹시나 할 뿐이다. 가련한 신앙이다.
그들이 나가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다. 예수 앞에서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던 사람이 말하였다. 무리가 놀랍게 여겼다. 더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들이 아는 상식으로밖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보이는 게 전부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끼어들어,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는 말로 현혹하였다. 그럼 또 덥썩 그리로 귀를 기울인다. 참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다.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셨다.
이 한 장의 말씀에 오만가지의 사연과 군상들이 운집돼 있는 것 같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참으로 별의 별 사연과 낭설과 중상모략이 난무하다. 그러는 것들에 무리는 열광하고 영광을 남발한다. 이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닌다. 예수님은 그러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36).” 참 안됐다. 그리 사는 신앙인이 수도 없이 많다. 주의 안타까움이 내 안에도 가만히 이는 것 같다. 전에 나를 생각해서다. 여전히 거기에 있는 누구를 생각해서다. 할 일이 참 많다. 누구의 사연을 듣다보면 기도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꾼이 더 필요하다. 기도를 우습게 여기면 허사다.
이렇게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는 동안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들어왔다.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내 마음의 여러 근심은 오늘 본 자들의 사연과 다를 게 없다. 누가 무슨 사연을 알리고, 어떤 일로 힘들어하며, 그것을 두고 서로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사연은 다 내 것과 다른 게 없다. 넘쳐나는 무리 같다. 보면 누구는 2, 3년 전의 고민과 어려움을 그대로 안고 산다. 여전히 그리 살면서도 저는 새로운 듯 모처럼 연락이 닿아 소식을 전하는데, 5년 전 고민이 그대로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차마 그렇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아픈 아이’는 뜬금없이 무슨 철도관리사 자격증을 따겠다며 공부를 하겠다는데, 할 수 있는 일인지 잘 알아보고 하라는 소리에도 소용이 없다. 저 애는 충동구매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어떤 판단이든 즉흥적이다.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다 둘러보면 내남없이 똑같다. 어느 사연인들 다른 게 없다. 맥락 없이 불쑥 자기 용건만 건네는 이도 있다. 나는 당황하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주님, 하고 부른다. 난감할 따름이다. 온갖 군상이 운집해 산다. 저마다의 사정과 사연이 다른 것 같으나 똑같다.
성경은 이르신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여기서 <이 세상의 신>은 자신들의 판단이다. 하나님 없이 가지고 있는 가치다. 그들 나름의 사고능력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린다. 안 믿는 사람들이야 늘 그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믿는다는 자들도 다를 게 없다. 심지어 주의 일에 부르심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하면서도 마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이 세상의 신’으로 어지러운 사람들도 있다. 오늘 본문의 다수인 무리는 본래 그러하고, 늘 따라다니던 바리새인들이야 본래 그런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다를 게 없는, 나 자신으로 인해 답답하다. 설마 저들 속에 내가 있는가? 저들의 사고체계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게 한다. 자신들의 판단이고 가치와 기준을 늘 우선한다. 그리고 이를 하나님께 통보하고 요구하는 것을 기도로 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성이란 그런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았던 터전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이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야 하고 마땅히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는 더 이상 외모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뭐라든, 스스로의 느낌이나 생각이 어떠하든, 이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더는 누구와 견줄 거 없다. 누가 뭐라 한들 대대거릴 것 없다. 나는 누구에게 그리 말해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두 죄인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둘 다 어두운 창살 밖을 내다보다, 하나는 칠흑같이 어두운 길목을 응시한다. 더러운 골목을 보며 옛날을 떠올리며 신세 한탄을 한다. 그러나 하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반짝이는 별을 응시한다. 같이 있으나 전혀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는 자들 같으나’ 그렇지 않다. 저들과 같지 않다. 하나님이 더하시는 날은 어제의 일로 골탕을 먹이는 오늘이 아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두라 하셨다. 오늘은 오늘로 족하다. 늘 새로운 날이다. 영원히 누릴 영광의 나라에서의 첫 날이다. 누구에게는 어두운 뒷골목으로 이어지던 옛날의 추억이겠으나 그래봐야 어제의 끝 날이겠다. 저에게는 이 지긋지긋한 날이 언제 끝나나 싶다. 그러나 우리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세상을 이긴다. 나의 이 고질적인 판단과 사고와 가치의 기준이 바뀐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세상이나 세속성을 ‘허영의 시장’이라 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이를 위장하느라 꾸미고 거짓으로 감추며 사는 허영의 시장. 온갖 모리배들이 오가는 뜨내기들의 장소. 누구도 그 시장에 머물지 않을 거면서 늘 기웃거리며 뭐 없다 하고 둘러보는 세계다. 이는 모두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인데, 세상살이 참 녹록하지가 않다. 누구는 예수를 목청껏 부르짖고, 누구는 저 스스로 운신조차 할 수 없어 다른 이에게 들려오고, 누구는 예수께서 지나실 때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하고, 죽은 딸의 몸에 주의 손이라도 얹어달라 하고, 죄인들이라 지탄을 당하면서도 이처럼 예수께 나아오는 것은 이미 복되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이 허영의 시장은 그런 곳이다.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사실에 안도한다. 슬픔도 고통도 어차피 지나간다. 좋고 행복한, 보람되고 즐거운 기억도 다 지나간다. 사라질 것을 두고 애지중지 미련을 갖고 사는 일은 부질없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가져갈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세상을 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의 성과가 어찌 되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게 뭐든 크게 괘념치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게 지혜다. 이 세상에는 흥미가 별로 없다. 점점 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억지로 애쓰지도 않는다. 기를 쓰고 종교적인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더럽고 쓸모없다 해서 또 굳이 피하지도 않는다. 기를 쓰고 이를 개선하려들지도 않는다. 놓아둠으로도 이미 가치가 없다. 물리적으로 세상을 미워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그냥 세상으로 그칠 뿐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 97:5).” 우리의 관심은 오직 주께 있다. 주님도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니 오늘 나의 이 허접한 글이나 생각이나 삶의 모양에 대해서도 별로 마음에 오래두지 않는다. 나의 나 된 것은 주가 더 잘 아신다. 잠결에 아들애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고 애태워하는 일도, 별 것도 아닌 일에 근심과 걱정이 먼저 요동하는 것도, 병적으로 불안해하며 심신이 피곤하다 해도, 나는 나조차 개의치 않음으로 주를 바란다.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세상에 살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엉터리 같은 믿음으로 쩔쩔 맨다 해도 들려 나오든, 절며 나오든, 소경으로 나오든, 부끄러움으로 남 몰래 나오든 주 앞에 나아오는 것으로 이미 되었다. 우리는 그저 열광하는 무리가 아니고, 구색을 갖추려드는 바리새인이 아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 나는 오늘 말씀 앞에서 새로이 결단한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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