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0편 / 우리의 가는 길

전봉석 2021. 1. 8. 13:06

 

20210110 주일

 

시편 40편

우리의 가는 길

 

 

들어가는 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는 길에 대해 나누려고 한다. 먼저 욥의 고백은 그 울림이 크다. 인생마다 어려움이 있다. 이를 연단하심으로 성경은 통일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왜?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사 8:13).” 그러는 동안 누구에게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다. 또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기도 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오히려 우리의 안전함을 확신하게 된다(14-15). 그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이를 알 때 욥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엄포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 서로 좋게 좋게 지내는 게 상책이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이는 그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어째서 그럴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성경에서 지칭하는 재물, 세상, 육체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소유, 사고, 판단 기준’을 일컫는다. 이에 바울 사도는 자신을 분명히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오늘 본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며, 이를 위해 항상 보호하시고, 그러므로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심이 주께 있다.

 

 

1.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살펴본 바 있다. 스스로의 열심과 수고로 애써 구원을 이루려는 자가 종교인이면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범사에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 특징은 뚜렷하다.

 

첫째, 우리는 기다린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 기다림은 인내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인내는 소망을 가졌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둘째, 우리의 걸음은 견고하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때론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는 다시 길을 간다. 속량하심이 주께 있음을 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셋째, 우리 입에는 찬송이 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찬송은 입만 열면 말하는 것이다. 입의 말은 곧 관심이다. 누구는 주식이나 아파트 시세에 대해, 누구는 게임에 대해, 누구는 감사를, 누구는 불평으로 저의 찬송을 입에 물고 산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입에 두신 찬송으로 산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98:1-2).”

 

넷째, 우리는 거짓에 치우쳐 끌려가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세상에 살면서 어찌 세상을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물질에 속해 살면서 재물을 초월한다는 게 아니다. 육체를 입고 살면서 육체를 부정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으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다섯째,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가 셀 수 없이 많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5).” 이와 같은 고백이 없는 성도는 종교인이 되기 십상이다. 스스로 애쓰니 하나님의 보답이 늘 인색하신 것 같다.

 

 

2.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책에 있나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우리 안에 가장 확실한 소원은 ‘내가 왔나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다녀왔습니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족처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뢴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9).” 아무나 우리 집에 그리 인사하고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집이다. ‘내가 왔나이다.’ 할 수 있는 특권은 주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풀어보면 성경이 온통 내 이야기다.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어떻게?

 

첫째, 우리에게는 항상 말씀이 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6-7).”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귀에는 들린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우리는 듣고 뉘우쳐 주께 아뢴다.

 

둘째, 우리는 주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를 더욱 갈구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 그리스도인은 종교인과 달리 우리 스스로 무얼 애쓰지 않고 주의 뜻으로 가닥을 잡는다.

 

셋째, 주의 성실하심으로 우리는 산다.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10).” 그렇게 우리는 늘 한 게 없는데, 주께서는 한없이 은혜를 부어주신다. 알면 알수록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3.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심에 대하여, 부당한 상황에서도 긍휼히 여기심을 체험한다. 그럴 자격이 없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승복한다. 어떻게?

 

첫째, 우리는 낙심해도 주를 찾고 실망해도 주께 고한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주께 아뢰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하다. 고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둘째, 우리는 담대히 도움을 주께 바란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 살만할 때야 누가 알겠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수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14-15).” 마치 어린아이처럼 부모의 품에 안겨 자신의 울분을 토하는 것 같다.

 

셋째, 우리는 주 안에서 즐거워한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16).” 하나님이 남으로 여겨진다면 이런 고백이 가당치 않다. 그러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하고 우리는 남들에게 할 수 없는 말도 주께 아뢴다.

 

 

나오는 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말씀은 여러 명의 저자가 각기 시대를 달리하고 살면서 동일한 기록으로 기록한 66권의 책이다. 그 책의 내용이 ‘나 때문에’ 쓰였고, 내 이야기로 가득함을 느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확실하다. 그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는 분명하여서 남편으로 인해 아내가, 부모로 인해 자식들이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5-16).” 안이하게 굴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3).”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다. 말씀을 엄히 받고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그 말씀에 기록된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여,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하며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견고한 걸음으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