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1-32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49-50
오벧에돔이란 이름이 성경에 나올 때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말씀이 함께 따른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대상 13:14).” 사무엘의 기록에 보면(삼하 6:1-15) 사울이 왕이 되어 해이해졌을 때 저는 주의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20여년간 방치하였다. 다윗이 왕이 되어 주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 3만여 명의 각계 인사를 초청하고 크게 행사를 열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5).”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법궤를 실은 소들이 날뛰었다. 그러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웃사가 죽자 다윗이 분하여 법궤를 모셔오기를 주저하였다. 그때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나서서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으로 메어가기를 청하였다. 그렇게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 그 집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석 달만에 그 소문이 다윗에게까지 들어갔다. 다윗이 다시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갔다.
어째서 웃사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날뛰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짐작컨대 웃사의 부친 아비나답의 집에 20여 년간 방치되다시피 모셔져 있었는데도 저의 이름이 거론될 때에 복을 더하셨다는 말씀이 없다. 단지 3개월간 오벧에돔이 자기 집에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을 주셨다. 혹자는 저가 가난뱅이였는데 3개월 만에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요는 3개월을 모신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고, 20여년을 모시고 있던 아비나답은 그의 아들이 즉사하는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생각의 갈래가 퍼져나갔다. 사는 게 다들 팍팍한 현실이다. 우리나라 인구 100명당 요식업을 한 개씩 하고 동시에 개업과 폐업을 한다고 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를 차지하였다. 다들 저마다 복을 추구하고 바란다. 그런데도 사는 게 늘 절박하다. 여기에서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상기한다. 구약에 복이라는 말이 4백여 번 언급되는데, 그때에는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이 없었다. 즉흥적인 복과 저주로 병마를 고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대의 부유함을 복으로 간주하였다. 저들이 꿈꿀 수 있는 복의 개념은 한정되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복의 의미를 확장한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더 들어가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28).” 곧 이와 같은 신앙이 신약시대에 오면서 예수님은 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벧에돔의 복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복의 산물이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그러하면 오벧에돔이 이상한 게 아니라 아비나답이 이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복의 진리를 가르치셨다.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일용한 양식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시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고,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둥 특히 마태복음 5장에 산상수훈의 8복은 우리로 어리둥절하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언급하신 게 신약에만 무려 110번이 넘는다.
다들 저마다의 요구와 바람, 간절함과 처절함을 안고 주께 구하고 기도한다. 가만 보면 안 믿는 자들이 더 잘 산다. 실제 내가 아는 고정관념으로도 불교인 중에 큰 부자가 많고, 가톨릭신자 중에 착하고 의로운 이가 훨씬 많다. 교회 다니고 신앙이 좀 좋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 같이 궁벽하다. 오죽하니 누구 말처럼 ‘널 보면 굳이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소릴 들을만하다. 사는 게 별로 축복 받은 것 같지 않다. 바울은 그야말로 온갖 병마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옥에 갇히기를 숱하게 하고 박해와 천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도 이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그리하여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하긴 내가 칼빈도 기구하고 파란만장하다. 서른한 살에 신실한 믿음만 있으면 좋겠다고 여겨 배우자를 고른 것이 자식 일곱 딸린 과부였다. 결혼 후 뒤늦게 얻은 저의 아이는 죽었다. 설상가상 저의 아내도 채 9년을 같이 살다 죽었다. 졸지에 남의 자식 일곱을 떠안은 홀아비가 되었다. 쉰셋에 죽기까지 저도 말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렸다. 고질적인 두통과 천식, 만성소화불량에 담석, 통풍으로 고통당했다. 그런 그가 개혁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청교도신앙과 장로교 정통을 수립하였다. 그의 생을 두고 복을 운운하기는 좀 꺼림칙할 정도다. 저는 자기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자신을 기리는 것보다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유언하였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복의 개념이 구약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으로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의 복은 신령한 하늘의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구약시대에는 더러 추측만 할뿐 상상도 할 수 없던 교리이고 신학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이어서 두 번째 우리의 복은 바울의 고백이나 칼빈의 자세와 같이 자족하는 복이다. 어떻게 저 지경에서 감사가 나올까? 싶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세상이 알 수 없는 복의 개념이다. 우리가 감히 스스로 자족할 수 있을까? 나의 이해와 지식으로는 어렵다. 안다고 해서 감정이 따르지 않고, 감정이 따른다고 해고 생각이나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다. 남들처럼 넉넉한 환경에서 풍요로운 삶을 꿈꾸며 자식들 잘되고 무병장수하길 바란다.
바울이나 칼빈이나, 다윗이나 모세나 가만히 믿음의 사람들을 돌아보면 저들 세월-시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왕자의 신분에서 쫓겨 가 철저하게 광야 40년의 고독한 삶으로 다져진 모세는 훗날에 민족의 지도자로 사는 내내 위협과 모욕을 당하고 살았다. 평생을 쫓기며 전쟁으로 시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다윗의 생은 말할 것도 없다. 칼빈이나 바울의 고달픈 시간은 가히 생각만 해도 부러울 게 없다. 시간을 말하는 두 단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는데, 크로노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이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다루시는 시간을 의미한다. 곧 믿음의 여러 선친들의 삶에서 엿볼 수 있는, 실제 내 주변의 많은 신실한 자들을 봐도 확신할 수 있는, 나의 지난 날 하나님이 다루셨던 시간들을 봐도 알 것 같은 시간이다. 특별히 다루시는 시간 속에서 몸의 연약함으로 고통당하는 시간도, 연일 겪는 어려움과 낭패의 시간도 있다. 그러니 안 믿는 자들은 물론 믿는다는 자의 시선으로도 우리의 궁벽함을 바랄 리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 다루시는 시간이다.
이에 반드시 그 대가를 성경은 약속하신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그리 듣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나름 잘 살았다고 여기는 이가 인생을 돌아보며 허탈함을 호소할 때 고달프고 어려운 역경의 세월이었으나 돌아보며 감사밖에 할 게 없는 사람도 있다. 주가 다루시는 아주 특별한 시간 속에서 사는 자가 복이다. 어제 낮에 묵상할 수 있었던 오벧에돔과 아비나답을 돌아보며,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나는 오늘 이 아침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긴다. 주의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신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그러므로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 곧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이에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49-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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