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0-23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 71
신약에 와서 복의 개념이 바뀌었다. 구약에는 잘되고 부요함이 기준이었다면 신약에는 그 패러다임이 뒤집혔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는 사람의 철학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말씀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구약에는 내세 천국에 대한 개념이 흐릿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에 반영되는 나와 우리 자손의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 날에 대한 개념을 새로 정립하시는데 110번이 넘는 언급이 있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0-23).”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예전과 달리 천국을 실현한다. 누리고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게 보인다. 그런 우리의 시선을 오늘 시인은 고난의 유익으로 돌린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눅 119:67, 71).”
고난을 달가워 할 사람은 없다. 고통이 좋을 리 없다. 다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추면 온갖 사연이 수북하다. 오늘 당장 운신을 못하는 친정엄마를 모셔 와야 한다. 누가 돌볼지, 서로의 바쁜 일상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이를 대신하여 시설이 번듯한 요양병원이 어지간한 건물마다 있다. 화려하게 잘 꾸며져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나는 저번에 장모를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몇 군데 방문을 하고 놀랐다. 시설이 여느 호텔못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그 중에 왕래가 용이하고 시설이 가장 나은 곳으로 모시고 엉치뼈가 붙기까지 한두 달 그 곳에 계시기로 하였다. 오전 일찍 모시고 오후에 무얼 전하려고 불시에 방문했다가 저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함부로 노인들을 몰아내세우고 윽박지르고, 상대적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들은 주눅이 들어 이리 몰려갔다 저리 몰려갔다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모는 하루를 지내더니 죽어도 거기 못 있겠다고 하여 결국 우리 집으로 모셨다. 겉으로는 저마다 괜찮은 척 하나 그 속내는 구리고 비참한 게 현실이다. 타이타닉 영화에서처럼 화려한 한 개 층을 위해 나머지 층들은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현실은 마치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이다.
이에 내가 주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것은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92).” 나에게 두시는 ‘고난’ 때문이었다. 현실이 종종 우리를 몰아가는 것 같으나 우리의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93).”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이 시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번잡스러운 어려움은 싫어하면서 안이한 중에는 무력해질 뿐이다. 오늘 우리에게 놓아두시는 어려움은 마치 양치기 개와 같다. 여기저기 가만히 몰려있는 양떼를 향해 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짖어댄다. 기겁을 하고 서로 붙어있어 의존적이고 게으른 양들은 화들짝 놀라서 저만치 목자를 향해 움직인다. 이를 나는 나의 현실에서, 내 곁에 두시는 누구의 사연과 안타까움에서 재확인한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99-100).”
누구와 대화를 하다보면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누가 어떤 어려움을 토로한다. 저는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이 없는 것일까? 처음 사람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직분-선지자, 제사장, 왕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저의 직능은 온전하여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이를 실현하였다. 모든 자연의 이름을 저가 붙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아는 자의 선포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선지자로서의 직분은 예언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다. 앞으로의 일과 이미 있던 일의 의미를 선지자로서 선포하고 그리 행한다. 또 아담에게는 제사장적인 능력이 있었다. 저들은 자신의 일-벌거벗은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의식할 수조차 없었다. 이는 저의 날이 온통 다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동행하는 예배였다. 자신의 처지나 모양 따위가 문제될 게 없었다.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고 즐기고 안식하였다. 그러한 기꺼움이 그것들을 지으신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이었다. 또 아담은 왕의로서의 직분을 수행하였다. 주신 땅을 정복하였고 다스렸다. 일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노동의 가치는 왕의 통치와 같이 거침이 없었다.
그러한 직분이 죄로 인하여 상실됨으로 더는 선지자로서 예언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모든 현상과 경우가 번번이 어려운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제사장적인 사명을 상실하면서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와 부끄러움에 함몰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가 되었고, 땅과 그 결실의 종이 되어 이를 얻기 위해서는 죽을 둥 살 둥 그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내세 신앙이 없던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하나하나 분리하여 가시적인 인물로 존재하게 하셨다. 그 역할을 수행하며 잊힌 바 자신들의 사명을 알게 하려 하셨다. 구약을 분해하면 족장시대로부터 저들의 선지자적 직분이 반 이상의 이야기를 차지한다. 다음 제사장들의 활약이 그려지고, 나머지는 왕들로 인한 오만가지 사연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는 오늘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사는 모습으로도 되풀이 된다. 우리의 죄성은 우리의 직분을 상실하게 하였다. 성경이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깊이 있게 보급되었음에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느끼고 선포할 줄 모른다.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입은 말하지 못한다. 믿는 자들 간에도 일상적인 이야기와 세상적인 주제로는 활기 찬데, 말씀으로 받을 수 없어 온갖 수다는 그치지 않는다. 예언의 능력이 상실된 것이다. 말씀을 보고도 그 말씀의 뜻과 실현을 분간하지 못한다. 또한 예배가 다양해지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부하여지기는 했지만 정작 제사장으로서의 직능은 사라져 서로의 감정을 울리고 느낌을 건드리다 마는 대중문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예배가 되었다. 그러니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기는커녕 늘 끌려 다니며 종노릇하기에 급급하다.
이를 회복하는 데 있어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의 선포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서이시다. 이와 같은 반문이 우리를 붙들어 세우신다. 하루하루 살며 오늘도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현장에서 그 사명을 주의 뜻으로 알지 못한다 우리의 선지자적인 직분이 얼마나 훼손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어쩌다 우연히 그리 된 현실은 없다. 우리의 모든 생활 반경은 우리로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뜻을 실현해야 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일깨운다. 마주하는 아이 하나, 그 아이의 안 믿는 가정 한 곳, 저들의 몸부림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주께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더한다. 어제는 한 아이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며 아이 교육비를 현금영수증 해줄 수 있는가 물었다. 기꺼이 나는 교회 헌금으로 기부금영수증처리를 해주겠다고 아내에게 일렀다. 곧 우리가 맡은 아이 하나, 그 교육의 현장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는 선지자로서의 일터-성전이다. 저의 영혼을 두고 기도하고, 아이의 막힌 담을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는 일이 아내의 일이고 우리의 사명이다. 단지 밥벌이가 아니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다. 그 돈으로 우리는 밥을 먹고 일상을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은 예배이고-감사와 찬송이 나타나는 제사장으로의 사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린다. 문제를 통치하는 왕의 권세를 가졌다.
이를 예수님은 회복시키심으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일찍이 욥은 고난으로 이를 앞서 알고 있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입을 빌어 한 말을 욥은 놓치지 않고 기록함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들려준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는 우리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이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도대체 하나님과의 화목 외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친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생활을 위한 교류?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이 배제되면 허사다. 내가 부모로서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한들? 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심으로다. 하나님이 사랑하심으로 내 곁에 두신 아내고 친구고 이웃이다! 가령 나는 누가 참 싫다. 저의 뻔뻔함과 무례함이 항상 저를 멀리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저와 얽힌다. 그런 저에게 내가 친절한 까닭은 저가 좋아서가 아니다. 또는 인내함을 덕을 세우려는 수고가 아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이가 새로 왔다. 탈북자 가정의 아이다. 말도 생각도 어눌하다. 어려서 끔찍한 탈북의 과정을 겪은 아이들은 드세다. 겁이 많은 만큼 억세다. 자기 고집과 완강함이 능글맞고 거칠다. 앞서는 자폐아이와 별거 가정의 되바라진 아이가 왔다. 완전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아이들이 공부방으로 온다. 이를 밥벌이로 여기며 가르치려면 자괴감이 든다. 아내는 그러나 신기하게도 감사할 줄 안다. 나는 이런저런 사정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데, 아내는 개의치 않는다. 한 번은 아내의 퉁명스런 말에 나의 깨달음이 컸다. '나는 하는 거 없어! 내버려둬. 하나님이 보내신 건데 뭐. 저절로 변해!' 처음에 나는 아내의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려웠다. 가령 자폐성 아이 같은 경우 처음에 우리는 모두 학을 뗐다. 그렇게 지랄맞을 수 없었다. 화가 나면 뒹굴고, 화장실에 처박혀 똥을 싸질렀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 한글을 쓰고 읽고, 자신이 해야 할 걸 한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묵묵히 그 아이를 '맡았다.' 아내의 답은 명쾌하게도 ‘맡김’이다. 자신이 맡은 걸 하나님께 맡김으로 해결한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영어 수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면서 희한하게 아이들은 몇 달 안 돼 성적이 향상된다. 성격도 달라진다. 신비주의자 같은 말이지만 우리의 존재 이유는 그 자체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과 같은 직분을 수행한다. 이는 우리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다 회복하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가정예배 때마다 지나가는 말처럼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5).” 저들이 씨름하는 교리적인 문제에 이보다 더 싱거운 답이 또 있을까?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19).”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해서 목사를 하겠나? 난 나를 잘 앎으로 크게 애쓰지 않는다. 애쓰지 않음으로 무던하게 또 하루 주신 날을 준행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 스스로 배부른 자와 웃는 자는 주려야 알고 애통할 때 비로소 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6).” 사람을 보고 사는 게 아니다. 가족을 보고 사는 것도 아니다. 날 위해 사는 게 아니다. 다만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한다. 싫어도 내 곁에 두는 사람을 사랑한다. 곧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시 119:57).” 나의 직분과 모든 맡은 바 살아가는 이유로,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63).” 오늘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게 가장 쉽다. 솔직히 나는 하는 게 너무 없다! 다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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