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전봉석 2021. 3. 14. 06:04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67-69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편 142:1

 

 

누구도 자기 혼자만의 문제는 없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소리는 무책임하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2).” 오늘 다윗은 이러한 교훈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소리 내어 부르짖고 주께 간구한다.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7-69).” 자기 문제라고 여길 때 주께 아뢰지 못하고,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할 때 더는 주를 바랄 수 없다. 진리는 서로 연결되었고, 한 가지 일은 다른 일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하다못해 이혼을 해도 자기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다. 자살은 말할 것도 없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고전 10:29).” 이 말은 자기 차원의 문제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넘어지면 교회에 누가 되고, 함부로 하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된다. 시편 73편 15절의 결의는 그런 의미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자신 때문에 다른 믿는 자들에게 욕이 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찌 해야 할까? 기도해야 한다. 삶의 평안을 느껴야 한다. 이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태도에서 놓여나서 주의 영광을 바라는 자세다. 세례 요한의 고백도 같은 의미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주가 흥하시는 일을 위해 내가 쇠하여진다는 것은 내 기분, 내 주장, 내 생각과 판단에서 놓여나는 일이다. 이런 말씀에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이게 참 어렵기 때문이다. 번번이 마음이 상한다. 내 기분 때문이다. 무엇으로 속상하다. 내 문제 때문이다. 내 생각 같지 않아서이다.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도 죄다 내 문제밖에 없다. 날 위한 요구만 가득하다. 그럴 때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만 나는 맡은 자일뿐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모든 게 그러하고 나 자신까지도 맡기신 바 구할 것은 충성이다.

 

이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3-4).” 먼저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구력을 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남의 판단에 무뎌질 필요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예민하면 그 책임을 스스로 지려할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팍팍한 영혼으로 살겠나? ‘내가 알아서 해!’ 하는 말보다 무서운 아집도 없다. 이혼이 어찌 혼자 문제고, 자살이 어찌 개인의 일일 수 있나. 마치 개인의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이 초유의 권한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시대라, 이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참으로 자신이 죽어 수억 번을 죽어도 모자라겠다. 내 의지로는 안 된다. 저마다 예수를 앞에 두고 더 나은 표적을 구하는 꼴이다.

 

그런 그들을 떠나신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4-15).” 저들이 왕으로 섬기려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고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 바람이다. 그저 병 고침과 떡을 얻기 위함이다. 먹고 사는 문제로 주를 바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언제까지 우린 이 수준에 머물러야 할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 바람과 구함의 수준이 달라야 한다. 그러자면 나는 죽어야 한다. 나의 요구, 나의 바람, 나의 기분, 느낌, 생각, 판단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스스로 그럴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자면 오늘 요한이 기술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우리 안에 궁금증이 인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 그저 당장의 문제,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엇을 기대한다.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나와의 씨름에서도 번번이 진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다른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13).”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길밖에.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이를 알지만 이를 행할 능력이 없는 자신을 주께 부르짖는 일, 이는 곧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요 6:32).”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나 됨의 어쩔 수 없음을 주께 아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 나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주께 고한다. 그러할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주가 하게 하실 것임을. 곧 내 문제가 단지 내 문제가 아니라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임을.

 

요즘은 날씨 탓이기도 하고 기분 탓이기도 하고, 나는 자주 우울감에 들고 몸은 멋대로 굴었다. 파스를 붙였던 자리가 성이 나서 붙일 수 없는 날은 더욱 짜증도 났다. 내 기분이나 몸이 그러하니 가족들의 하는 짓도 맘에 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공연히 화가 난 사람처럼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그러는 아들의 눈치를 보다 나도 그러고 있는 것이고, 그러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 아내가 못마땅하고 실은 그러는 내가 마뜩치가 않은 거였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서로가 꼬여 있는 것 같은데, 실은 내 속이 꼬여 있는 것인지. 한없이 몸도 마음도 가라앉는 하루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마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얼마 전 낚싯대를 모두 팔아치우고 난 뒤부터인 것 같다. 벌써 몇 년째 한 번도 못 가고 차에 가득 실려 있던 장비를 블랙박스를 새로 교체하면서 헐값에 서로 맞바꾸고 만 것이다. 아내도 그렇고 다들 속시원해하는 터라 내색은 못하지만 불쑥 슬프고 불쑥 서러운 것이… 사람의 미련은 참으로 고약한 것이어서 저 혼자 또 사람을 들들 볶는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기분이 까부라지는 것이겠나 싶지만.

 

그러니 나야말로 늘 영적 전쟁이다. 멋모르고 구한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그러자 주님은 흔쾌히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그러니 그게 어디 우리 의지로 되는 일이던가? 나는 당장의 표적을 구하듯 행복을 추구하고 바라는데, 예수를 앞에 모시고도 기적과 이사를 꿈꾸고 있는 것이어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아, 나는 나의 나 됨으로 번번이 실패다. 누구에게는 고작 낚싯대 하나이겠으나 거의 한 생을 내 곁에서 나의 동무가 되어주던 위로였고 언제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그야말로 피안의 세계였는데… 너무 성급했나? 나는 이 헛된 후회로도 쩔쩔매는 위인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송구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부디 나의 이 나 됨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 말씀 앞에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나를 한심해하면서도 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에 우울할 따름이다. 이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나의 이 하찮고 어처구니없는 마음과 생각과 육신의 일로 번번이 쩔쩔매는 주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마치 나는 여러 개의 나로 분화하여 주를 소망하는 나와 나를 추구하려는 나로 개체화되는 것만 같다. 그런 나를 앞에 두시고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 주님은 말씀을 이어가신다.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6-57).”

 

오늘 말씀을 두고 나는 문득 드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없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그것으로 내 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주를 나타내야 할 소임에도 막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본다. 어제 하루는 그렇듯 올무에 걸린 것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몸으로 혼자서 끙끙거렸다. 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시 142:1).” 그렇게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2).”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3-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