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24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내가 주님을 의지하니, 아침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앉는다(새번역성경). 말씀을 읽을 때 어렵다고 하여 쉬운 성경을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시(詩)가 어렵다고 해서 산문으로 해설된 것을 읽으려 하는 것과 같다. 누가 그리 구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음미하는 것이고, 실은 성령께서 읽음과 이해를 열어주셔야 할 일이다. 시 읽기의 맛도 여러 번 되새김에 있다. 후루룩 먹어치우는 국수가 아니다. 오래 씹고 물고 뜯는, 즐거운 집중이 있다. 이는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움키고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여기서 굳이 아침인 까닭을 ‘으르렁거리며’로 되새겨본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하나님의 특성에 속한다. 새벽은 어둠이 집약된 시간이다. 가장 춥고 피곤한 시간이다. 동시에 곧 여명이 밝아올 희망이 조급함을 더한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것은 주께서 도우시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이 새벽, 곧 아침이다. 일찍이 시인은 이를 깨달았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저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의지를 들고 깨워 새벽을 맑게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08:2).” 예수님도 이 시간에 일부러 자신을 깨우셨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일부러 우리의 한 날, 그 첫 시간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이 좋아서, 결코 아무에게도 빼앗기려 하지 않는 무엇, 의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중첩된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이는 안식일에 무슨 일을 행하는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이 설왕설래하는 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곧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21).” 어쩌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예수님의 젖동생 형제들도 그리 말하였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3-4).” 요한은 이를 덧붙여 설명하기를,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 같이 하며 따른다 해도 곧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믿음이 자신의 기준과 잣대일 때가 많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어림없다. 훗날에 야고보는 이를 깨닫고,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하는 성령으로의 깨달음을 더했다. 결국 성령으로다. 사람으로가 아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
믿는 것도 이를 알고 음미하며 주를 바라는 것도 실은 모두 성령이 이끄심으로만 가능할 일이다. 이를 두고 목마름을 느끼는 영혼이 귀하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오히려 풍족하다고 느낄 때다. 오늘 본문은 ‘명절 끝날’에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한참 왁자하고 부산하여 정신없이 바쁘고 경황이 없을 때다. 이를 새번역성경에서는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고 해석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맞지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표현처럼 명절엔 어쨌든 이래저래 풍성한 법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님은 그 시간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이를 오늘 시인이 부각시키는 아침과 연관을 지어 생각한다. 곧 아침에는 모두가 경황이 없다. 잠이 덜 깬 상태이면서 새로운 날을 서둘러야 하는 시간이 중첩된다.
이를 시편 46편에 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시간’으로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고는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6).” 곧 이때는 ‘뭇 나라가 떠드는 시간이다.’ ‘왕국이 흔들리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이나 하루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매일 겪는 전쟁의 시간이다. 우리 집만 해도 새벽 여섯 시가 되면 딸애가 황급히 일어나 씻고 출근할 준비를 한다. 뒤이어 아내가 서둘러 친정에 갈 준비를 한다. 저들이 준비하는 동안 나 역시 서둘러 씻고 부지런히 집을 나선다. 길목에 둘이나 있는 떡집에는 각각 불이 환하게 밝아 김이 허옇게 서려 분주하다. 곧 있으면 아이들이 등굣길에 오르고 날이 환히 밝으면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이어진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리는 시간이다.’ 명절 마지막 날 같다. 한참 부산하고 정신없을 때에 하필이면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길,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8).”
누가 귀 기울여 이와 같은 말씀에 주목할까? 나 같이 직업적이고 한가한 사람이야 이처럼 은혜롭게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저마다 분주하여 성경 한 구절도 묵상하기 어려운 시간에… 실은 그때가 우리 영혼이 가장 목마름을 느낄 때이다. 실은 그러면서들 챙겨 먹을 건 다 챙겨먹는다. ‘명절’인데 어련하겠나? 나름 육신의 소욕은 챙길 줄 알지만 영혼의 갈급함은 후순위로 물러난다. 왜 그럴까? 요한은 이를 또한 집중하게 하였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 곧 성령으로가 아니면 사람으로는 이를 구하고 찾을 여력이 없다. 본디 삶이란 여유가 없다. TV 앞에 널브러져 있을 수 있으나 말씀으로 쉼을 얻을 시간은 없다. 육신의 고단함은 알면서 영혼의 갈급함은 뒷전이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사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를 요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의 ‘완전한 사람’으로의 시절을 묵상하며 여러 번 되새기었다. 사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나라다. 일찍이 죄가 들어오기 전, 저의 삶이 아무리 충만하고 충분하고 풍성하였다고는 하나 실은 아직 그 영혼의 일이, 그 영혼의 목마름이 해결되기 전이었다.
그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곧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하고 덧붙이기를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새번역성경 참고). 같은 의미로 이해가 된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으로 그치지 않는다. 에덴은 모형이다. 천국이 아니다. 모델 하우스는 같은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목마름은 그 자체로 산 자의 것이다. 죽은 영혼은 목마름을 알지 못한다.
어제 뜻하지도 않게 아이가 예배에 왔다. 여러 날 준비하던 시험을 끝내고, 결과가 여의치 않아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는가, 하고 나는 일부러 연락을 좀 미루고 있었다. 공황은 좀 어떠한지, 마음은 그래서 어찌 다스리고 있는지, 신경이 쓰이는 만큼 주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역시,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선으로 바꾸신다. 녀석은 왠지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고 의젓하였다. 나는 저에게 어지간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사귀고 있는 여자아이도 막연하게 미루지 말고 주 앞으로 인도할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일렀다. 아들도 같이 와서 대화를 좀 나누었으면 했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조바심 낼 문제가 아니다. 시인은 이를 알고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46:7).” 그러니 저의 결론은 당연하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다만 우리는 이를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8).”
누구에게 기대하고 무엇을 바라는 일에 있어서 나는 이제 조금 알겠다. ‘너는 가만히 있어!’ 하고 성경은 이르신다. 하나님이 행하신다. 이래저래 나의 분주한 ‘명절’이 오히려 나의 영혼의 목마름을 알게 한다. 주가 어찌 행하셨는지, 오늘 시인은 이를 명백히 한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5-6).” 누구를 두고 여러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어떠했던가를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럴 때면 나의 영혼은 마른 땅 같이 주의 생수를 갈급 한다. 동시에 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침을…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7).”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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