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전봉석 2021. 3. 16. 06:0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8:50-51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더는 세상을 바라고 의지하지 않는 것은 복이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같은 곳에 살지만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나란히 걷고 있으나 다다르는 곳에서의 영화가 다르다. 때론 불확실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자기생각을 말하고 싶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기다리는 것이 복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이는 어떤 경지에 이른 신앙으로가 아니라 다만 주가 주시는 믿음으로다.

 

속상하고 어려운 마음이 짓누를 때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하시는 말씀 앞에서 묵묵할 줄 아는 마음의 평안도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덧붙여 설명한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1-22).” 이 놀라운 말씀 앞에 잠시라도 입을 다문다. 여러 뒤엉긴 생각은 쓸데없는 질문에 시달리게 한다. 주께 바라는 마음으로 정신이 없다. 요구는 끝나지 않고 토로하는 심정은 넋두리처럼 흘러간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강경하게 대처하신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그러한가? 내 중심의 여러 생각과 불안과 안달복달하는 마음이 정녕 주를 바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가? 돌아보는 나에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아,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이 놀라운 진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숨 쉴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예수께서 그러한 나를 보시며 말씀하신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0-51).” 주님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구하는 삶으로 걸어가셨다. 이를 알고 구하고 주의 길을 가만히 따르는 자는 복이 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살 수 있는 일은 내 중심, 그 모든 주체를 주로 모심이었다. 시인은 고백한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3-4)

 

사람으로는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주의 길을 알 수 없고 그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처음 사람 아담은 이의 모형이다. 오늘 우리가 받은 자유는 저의 자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29, 31).” 누가 어떻게 보는지, 심지어 나를 나는 어찌 대하는지, ‘나의 자유는 남의 양심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 죄 많아 정죄당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는데, 그게 가능한가? 완전한 사람이었던 아담도 그처럼 어이없이 죄로 무너졌는데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가 어찌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믿을 수 없는 중에 믿고 바라는 것이 크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앞선 믿음의 사람들이 본 것은 이 땅에서의 실상이 아니라, 더 나은 상급을 위한 ‘믿을 수 없는 중’의 것이었다. 때로 그 길은 참혹하고 무모하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 그러면서 믿음이란 기이한 것이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 세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으로 오롯이 주를 바란다는 것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가만히 아주 가만히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오래 머문다. 얼마나 우린 조급하고 성급한지, 구하는 것의 대부분은 당장의 요구다. 곧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늙으신 부모의 질병으로부터 자신의 고단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늘 당장 손에 쥐는 믿음을 원하고 성경은 늘 더 나은 ‘예비 된 것’을 약속하신 것만 같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자라가는 중이다. 무던히 또 묵묵히 믿음이란 여러 충격을 더하면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충만하게 자라가게 하신다.

 

즉 나의 차원에서 문제를 보지 않는다. 당장의 성급한 응답으로 추구하지 않고 이를 추구하는 무리들을 조심한다. ‘사람이 먼저다.’ 이보다 더 사람을 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구호는 없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인생은 결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는 것이다. 어제는 우연히 ‘자살생존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곁에 가까운 사람이 자살을 하고 남겨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평생을 저들은 무거운 짐에 짓눌려서 살아야 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수시로 억압한다. 한 사람의 자살자로 직접적으로는 그들 가족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멀게는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역기능에 이르기까지. 단지 ‘저 혼자만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문제는 없다. 부모의 성향과 성격이 자식을 억압하고 자식들의 고약한 심보가 부모를 정죄한다.

 

영화 <바벨>을 봤다. 일본에서 누가 아내를 잃고 모로코 외곽 산간마을로 여행을 떠나 사냥을 하다 그 총을 가이드에게 선물로 남겼다. 저의 아내는 자살을 했고 그 일을 극복하는 데 있어 저의 여행은 뜻하지 않은 파급을 일으키고, 벙어리 딸아이는 고단한 방황을 한다. 그가 선물로 준 사냥총은 어느 목동의 가정에 헐값으로 팔리고, 두 아들은 염소를 치며 수시로 염소를 물고 가는 자칼을 쫓고 사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두 어린 소년은 언덕 위에서 멀리까지 실탄이 날아간다는 의구심에 꽤 멀리서 다가오는 미국인 관광객의 버스를 향해 총을 쏘았다. 총알은 하필 창가에 앉았던 부인을 맞추었고. 느닷없이 날아든 총탄에 버스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를 테러로 규정하려는 국가 간의 갈등은 일을 복잡하게 하고,  그 부부는 멕시코 여인을 보모로 두고 있던 평범한 미국 사회의 가정이었고, 권태기와 결혼의 위기를 극복하려 둘만의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귀국은 지연되고, 그 사이 아이 둘을 맡아보는 보모는 아들의 결혼식을 미룰 수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까지 들어갔다. 그야말로 얽히고설키는 문제의 발단은 멀리 일본의 한 가정에서 아내가 총으로 자살을 한 사건이 계기였다.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저마다 개인의 문제는 여러 문제로 파생한다. ‘인생에는 결코 혼자만이 문제란 없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알고 계셨다. 창녀로 잡혀온 여인을 두고 긴 말씀을 삼가셨다. 다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어째서 그 일을 하는지, 어쩔 것인지,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영광 외의 모든 자기의 영광이다. 추구하는 바, 가치와 기준과 나름의 만족은 모두 죄다. 예수님은 그 앞에서 단호하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어둠과 빛의 갈림은 모호하지 않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 주께서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으심은 오로지 아버지의 판단을 아심이다. 저는 아버지와 본체시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다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죽기까지 복종하신 까닭은 나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더는 한정되지 않음을 증명하신다. 나는 주의 것이라, 하는 바울의 고백은 여기에 기인한다. 때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우울감에 젖다, 그러는 나로 인해 불편해하는 가족과 해야 할 일을 미루게 되는 것에 다시금 돌이켜, 주를 바란다. ‘다시는 죄 짓지 말아라.’ 하심은 그럴 수 없는 것을 그리하라는 막연한 교훈으로 더하신 말씀이 아니다. 주를 바라고 그의 영광을 우선함으로 가능하다. 나는 결코 나의 의로 주 앞에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의로 세마포를 입는다. 주는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셨다. 사탄으로 더는 정죄하지 못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더는 내 문제란 없다. 당연히 나 혼자만의 문제도 없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주님의 증거가 나의 고백이 되게 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이는 곧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내가 속한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50).” 이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말씀 앞에 벅찬 마음으로 앉아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이는 곧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 144:1-2).” 그러므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