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전봉석 2021. 3. 17. 06:0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3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편 145:2

 

 

불난 집에서 내부 구조나 가구 배치를 놓고 씨름하는 꼴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어서 본질은 사라지고 잘잘못을 따지느라 정작 다급한 게 뭔지 모른다. 임박한 진노 앞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오늘 본문에서도 바리새인을 위시하여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가관이다. 맹인이 눈을 뜬 일은 간 데 없고 안식일을 범한 것에 시빗거리를 삼거나 저의 눈 먼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우리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던 말을 중지하고, 바라보던 곳에서 주를 응시하게 한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곧 우리가 바라고 구하는 영광이 무엇인지.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시 47:1-2).” 언제부턴가 우리의 신앙은 심리학적인 위로에 머물고 신학적인 지식으로 안주하며 저마다의 위로나 평안을 빌어주는 정도에서 만족한다. 핵심은 맹인이 눈을 떴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이를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주목하게 한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나의 안위와 평안이 아니다. 나로 이롭게 하는 종교의 방편으로도 아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일련의 사태와 당면한 현실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정치를 논하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라, 엎드려 주 앞에 부복해야 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결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 어느 시절이나 그 사람들이나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

 

성경의 주제는 하나다.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그러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여기가 어디며, 누구 앞에 섰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를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사는가?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사 63:15).” 고로 우리의 가장 숭고한 사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이를 앎으로 은혜를 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두려움이란 곧 경외함이다. 이는 그저 막연한 무서움이나 이것저것 다 들어 느끼는 마음이 아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과 서로의 경계를 정하고 해하지 않기로 약속할 때, 라반은 여러 신들을 통틀어 하나님을 포함한다. 그러나 야곱은 오로지 한 분,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콕, 짚어서 말한다.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삼촌의 말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단호히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였다(창 31:51-53). 내가 아는 누구도 그렇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한다. 두루 모든 신을 통칭한다. 저의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르다. 앞서 야곱이 삼촌 라반에게 이르기를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 분명히 그 대상은 한정되었다.

 

이를 고라의 자손은 명백히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시 47:3-4).”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우리는 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를 앎으로 저들이 뭐라 해석하고 어찌 받아들이든지, 다니엘은 엄히 주장하였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단 5:18-19).” 막연한 어떤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다.

 

저는 크고 두려우시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이것이 우리의 합창이고 영광이다. 욥은 우리를 돋우어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이를 알게 한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할 이는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시고, 우리는 다만 주께 아뢸 따름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 9:32).” 이 모든 자연만상이 주의 손으로 움직인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5-6).”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언제든 건강을 자랑할 수 없음에도 저마다 자신하고 사는 자신으로 인하여 온전히 주를 바랄 수 없다. 그런 우리의 안일함을 아심으로 성경은 일갈한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3).” 저로 우리 삶의 ‘먹을거리’로 삼아야 한다. 취하고 누릴 영광이시다. 저는 우리의 승리이시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시 47:5-6).” 우리가 사는 동안에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46:1).”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주의 임재, 우리와 함께 동행하심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7).” 야곱이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고백한 내용이다.

 

하나님을 보고 죽지 않는 것은, 우리뿐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 하나님의 존귀하심 앞에 서면 우리의 경탄은 금세 두려움으로 바뀌어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으로 몸 둘 바를 알지 못한다. 하물며 천사들을 보고도 놀라자빠질 일인데 하물며,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단 10:10-12).”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두려움은 정상이다. 먼저는 주의 임재 앞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압도당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도 없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곧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1-2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여실히 느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함을 내세우는 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마치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그렇게 떠벌이고 선동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우리는 다만 어떤 의로나 선으로도 주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우리는 주의 임재하심에서 주의 선하심을 본다. 나 같은 죄인을 어찌 그리 사랑하시는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그저 다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곧 우리가 주의 은혜 앞에 설 때면 우리의 완고함도 스스로 자신하는 확신도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알게 된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전 6: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3).” 우리는 주의 선하심 앞에서 떤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저 하찮은 모래를 두어 거센 바다가 우리에게 넘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 47:7).” 시인은 외쳐 노래한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8-9).” 곧 우리의 두려움은 주를 경외함이요, 주를 경외함은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정리하면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죄를 두고 죄사함을 선언하실 때 그 앞에 엎드리지 않을 자 누구인가?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

 

전에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나는 괜찮은 줄 알고 여겼던 지난날들에 대하여 주의 임재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된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그런 나를 죄 없다 용서하시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앞에서… 곧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아,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곧 더는 나의 죄책감으로 시달리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용서가 너무도 황송하여 나의 추함과 더러움으로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감격한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3).”

 

오늘 요한복음에서 설왕설래하는 사람들의 논쟁에 치를 떨다, 실제 내가 사는 사회를 본다. 나를 돌아보며 내 안의 갈등과 여러 뒤엉긴 생각을 부끄러워한다. 이에 시편의 찬송에서 더욱 은혜가 크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45:3-4).” 그러므로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21).” 이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