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6:32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2:9
현실적으로 일을 자초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오늘 사도행전 결말에서도 바울이 앞서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석방되었을 것 같은 여지를 남긴다. 단지 그 현상으로 보면 그런 것 같고, 좀 더 들여다보면 저들의 멀쩡한 자기변명 같고, 일이 되는 게 점점 꼬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가늠하는 그 이상과 이하를 초월한다. 실제 우리는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아주 극적인 상황이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저지른 치정이다.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삼하 13:14).” 그때는 그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15).” 나는 이 상황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 마음이란 게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르겠다.
현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고 말들이 많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다.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자신들의 권한을 그렇게 회피하며 바울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오늘 쥐고 흔드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맬 수 있겠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가령 영혼까지 끌어 모아 똘똘한 아파트 한 채를 사는 것을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다. 눈이 벌게서 주식 시장을 살피고 하루의 장세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말을 들을 때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게임 시장이 번창하고 이상하고 야릇한 것들이 돈벌이가 되는 세상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이것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걷게 하신 나의 무지함이 다행이란 생각도 한다.
단지 그때뿐이다. 소위 사랑이란 것도 매력이 있을 때나 마음이 끌리는 것이지, 그러다보니 버젓이 불륜과 외도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끈다. 사랑도 기호가 되고, 사는 일도 사는 동안 평안하고 안락한 것으로 낙을 누린다면 오늘 본문의 바울보다 한심하고 운이 없는 사람도 없겠다. 그럴 때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비튼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우리가 주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게 무얼까? 나는 요즘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정도로, 해야 할 걸 묵묵히 더하는 게 그 비결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스스로 너무 애쓰지 않고, 주신 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을 아는 게 복이다. 즉 오늘 시편의 첫 소절은 모든 시름을 잠잠하게 하신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내가 뭐라고!’ 나는 종종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감사를 느낀다. 아침에 일찍 설교원고 초고를 마무리 하고 습관대로 금요일 오전에 물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하였다. 책상을 옮기고 아들이 공부하는 데 있어 자꾸 내가 거치적거리는 것 같아 자리를 바꾸었다. 그 힘이 어디서 났는지! 두어 시간을 진땀 흘려 정돈을 마치고는 그럴 수 있는 사지육신과 내게 두시는 마음과 그와 같은 고단함을 사랑하였다. 오후께는 설교원고를 마무리 짓기 무섭게 온 뼈마디가 다 쑤셔서 소파에 장판을 올리고 허리를 지졌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한숨 푹, 곯아떨어져 자고 일어났더니 땀이 흥건하고 몸의 피로가 풀렸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오늘의 감사로 다행이다. 누구 글에서 읽은 간증인데, 어느 성도의 문병을 가서 곧 죽음이 임박한 저에게 위로하고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저가 다시 기도를 부탁하였단다. 너무 낫고자 애쓰기보다 평안히 주 앞에 가기를 소원합니다. 어렴풋하기는 하나 그런 내용을 읽고는 여운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모두 살고자 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잘되길, 좋은 성과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기본 전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래서 나는 종종 (물론 자신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하루,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으면 한다. 몸이 고단하고 나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주신 한 날의 감사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그 사랑을 최대한 누리고 안식할 수 있기를. 그래서 좀 우스운 소리지만, 하루를 정리하고 집으로 갈 때, 혹은 집을 나서며 하루를 시작할 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정돈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걸을 수 있을 동안 내 발로 걷고, 이처럼 묵상하며 글을 쓸 수 있는 날 동안 묵상하기를 쉬지 않으며, 한 주일을 정돈하는 의미로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정돈을 할 때의 자세로도 이미 그것은 예배였다. 예배란 범사에 주를 인정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란 엄연한 사실을 붙들고 그 앞에서 거동하는 것이다. 이때 요나의 기도처럼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혹은 욥의 고백처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굳은 믿음처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단 3:17-18).” 하는 이러한 고백과 믿음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는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오늘 하루, 지금 이 시간 할 수 있는 이 정도의 것으로 주를 바란다. 수없이 설교원고를 수정하다, 누가 본다고! 묵상글을 여러 번 읽고 고치며 다시 읽다가 이 일이 궁극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것을 깨닫는다. 아니면 내가 뭐라고 이처럼 주를 바라고 의뢰할까?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7:11-12).” 내가 뭐라고 주께서 이처럼 나를 이끄시고 귀히 삼으시나. 나는 종종 누구의 어려운 사정과 그 가족사를 보며 어릴 적 내가 그처럼 목사 아들인 게 지겹고, 다들 믿는 가족들과 형제들로 불편해하였던 마음을 회개한다. 그야말로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분에 넘치는 은혜로 오늘까지 함께 하셨다. 오늘에 맡기신 이 모든 사소하고 하찮은 일을 사랑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문득 누구와 통화하면서, 또는 어딜 청소하다, 길을 걷다, 삐끗하고 어디가 아파 통증을 감내하면서 ‘곧 이 때라!’ 우리의 예배는 늘 매순간이 ‘이 때’다. 요즘은 지팡이를 짚고 걷다가도 자주 돌부리에 걸려 휘청할 때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괜히 서글프다. 특히 얼마 전에 낚싯대를 다 처분한 뒤로 가끔씩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오곤 한다. 그냥 둘 걸, 하는 후회도 크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아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 피식, 웃고 말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 이는 광야 1년 남짓한 길을 걷고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9).” 백성들에게 말하는 모세를 생각한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30-31).” 앞서 먼저 가시며 우리 길을 인도하시고, 목전에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알고, 이곳까지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었다. 그 사랑은 어찌 말로다 표현할 길 없는 무궁하심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호 3:1).” 아, 어쩌자고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는 게 없는데,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니!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더하시는 은총이 귀하였다. 닉부이치치의 말처럼 어떤 기적을 바랐으나 나로 기적이 되게 하셨다. 문득 에스겔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6-8).
일련의 일들로 힘겨워하는 곁의 사람들에게, 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약물에 의존하며 하루하루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며 사는 나에게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면 됐지 않겠나? 이 모습 이대로 주께 내어드리며, 설령 나를 죽이신다 해도 더는 소망이 없다 해도 주를 신뢰하고 주의 성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 충만하신 주의 사랑이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완성되었고, 이는 모두 ‘이 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은 엄히 경고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 32:9).” 행여 나의 아둔함과 미련함으로 다른 것으로 위안을 삼을까 하여…. 시인은 일갈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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