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불편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긴장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올라가고, 피가 신장과 중추신경으로 모이고, 소화기에서 음식물을 운반하는 기능을 중단하고, 간에 저장된 당분이 배출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고 한다. 이는 화를 낼 때도 같아서 우리의 신체는 먼저 반응을 하고 스스로의 건강을 해친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스트레스가 문제라고 하는 것 같다.
오늘과 같은 말씀 앞에서 믿는 자로서 당연히 결연한 마음이 든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온갖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일은 때로 엄청난 투쟁인 것 같다. 이런저런 주변 여건은 그렇다 쳐도 무엇보다 자기 우리 자신의 해이함이 문제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전까지 어쩜 그렇게 안이하고 태평한지, ‘롯의 사위들’ 같이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또는 일관되게 거절하는 사람들처럼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8).” 그러니 그게 어느 특정인의 문제이겠나?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9-20).” 저마다의 사연이 우선이다.
그러다 어려운 일이 터지면 우리의 인지능력은 몸의 본능을 따라가지 못한다. 저마다 다른 복음을 추구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 서로의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받은 일이 없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음미하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이다. 이를 위해 풍랑을 동원하시기도 한다. 주의 일이시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사 48:13).”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때론 나의 지능이나 감각보다 몸의 반응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 9:8, 10).” 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나는 지혜를 구한다. 말씀을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원한다. 내가 무얼 하려하기보다 되어지는 것에 집중한다.
어제도 누가 왔다. 아주 잠깐 한 10여 분 앉아 있다가면서 저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말하는 입보다 귀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이를 행함으로 사는 일은 속이 터진다. 우리의 말이란, 주를 바라고 의탁하는 데 비상구 같아야 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손위 사람이라 차마 말을 끊고 뭐라 이르기 어려워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굳어진 습관과 같아서 서로 있을 때 말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뭐라도 떠벌여야 한다. 대부분 연관도 없는 말들이다. 말이 끊기면 힘든 사람 같다. 그런 자의 특징은 계속 혼자서만 말한다. 듣는 연습이 안 됐다. 그러면서도 항상 대화를 강조한다. 말에 은사는 주심으로 받는 일이지 아니면 궤변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잠깐이지만 저가 다녀가고 정신이 쏙, 빠진듯하였다.
지혜가 머물 자리가 있어야 한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 4:13).”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게 덕이다. 그 어떤 소유보다 귀한 것이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 37:16).” 누구와의 대화는 그래서 피곤하다. 실제 대화란 피곤함 그 자체다. 듣는 일은 이중의 피로감을 더한다. 말로 어찌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듣고 저를 이해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면 마음의 문제이겠는데,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런저런 고난이 우리로 단련하게 한다.
덩달아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오전에 장모가 인천으로 와서 손목 수술을 하여, 짐을 챙겨가는 아내를 데려다주고 중간에 뭘 또 가져다 달라는 심부름을 몇 번 하고, 아들을 챙겨 점심을 먹이고, 오후 수업준비를 다 해놓고 나갔는데 시간이 늘어져서 수업을 못하게 됐다. 일찍 들어가 도로 책상을 접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준비해서 아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고… 여덟 시도 안 돼 누웠다가 나는 녹초가 되어 잠에 곯아떨어졌다. 물론 요즘은 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공사 중이라 낮잠도 못 자는 통에 하루가 괜히 분주하고 바쁘다. 나야말로 바쁜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이라, 저 모든 상황에 앞서 나는 긴장한다.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앞서 생각하고 여러 예측을 동시에 하며 대비를 한다. 그러느라 소비되는 감정과 시간과 몸의 피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것이 나의 약함으로 인한 것이니,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그러다 오후께는 누가 와서 혼자 떠벌이며 나의 자태, 평온하고 안락한 듯한 모습을 부러워하며 좋겠다느니 어쩌니 하다 갔으니 서로가 그 속을 어찌 알겠나?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 12:8-9).” 주가 이루시는 세계다.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이를 마음에 새겨 간직함으로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본다. 다윗이 곧 그러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시므이가 쫓아오며 조롱할 때에 저를 죽이겠다는 아비새를 말리며,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그러고 말았던가? 우리는 그저 관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뒤이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16:12).” 온전한 신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내가 아는 그 이상의 능력이다. 인위적으로 그리 여겨 삼키는 생각이나 각오로가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다. 주가 행하신다. 주가 하실 수 있도록 하는 덴 나는 가만히 있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서로가 다르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 10:11).” 누가 누구더러 뭐라 하겠나만 다시 또 느끼는 것은 말씀으로밖에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저는 성경을 암송하고 영어 성경을 자기 능력에서 해석하며 성경 한 권을 다 정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함부라타? 하브라타? 뭐라 하던데? 어디서 그런 성경공부 법이 또 유행처럼 이는지, 읽고 암송하고 해석하는 일인데, 나는 저에게 그걸 혼자 혼자하시는가? 하고 물었다. 물론 질문에 다른 말이 길어져 더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자칫하다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되기 쉽다. 그리 홀로 거룩하여지는 것이 성도가 서로 문안하는 일보다 수월하다. 서로를 돌보며 누구 말이나 일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자기만족으로 자기 말에 젖어 사는 게 용이하다. 그러니 뭐라 한들! 말이 길어진들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주의 이름만 되뇌다 말았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이 또한 지혜라 여긴다. 말을 아주 안 할 수는 없지만 굳이 해서 소용없는 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본이 된다. 다들 미치지 않고서야, 모르면 모를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오늘 본문에 나도 같이 의아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건지는 알겠다. 모든 일이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닐진대 어쩌다 그리 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엄연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
이런저런 방식에 대하여는 내가 할 말이 없으나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하여는 단호할 필요가 있다.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야 한다. 척을 지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오늘 본문은 단호하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오만가지 생각을 가진 오만사람이 다 모여 사는 것이니 어쩌겠나만 분명한 기준 하나,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하여 나는 더욱 말씀으로 말씀 밖을 경계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20).”
어쩌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 이 지경이 되는 경우들에 대하여 마치 유행처럼 성경공부(?)도 번지고 저마다의 주장을 접점 없이 찾아가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4).” 누가 말하길 너무 고리타분하단다. 새로운 기법을 운운한다. 어쩌겠나? 주께 호소할 뿐이다.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0) | 2021.06.13 |
---|---|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0) | 2021.06.12 |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0) | 2021.06.10 |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0) | 2021.06.09 |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0) | 2021.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