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전봉석 2021. 6. 27. 05:31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을 묵상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묵상은 되새김이다. 소가 삼킨 것을 게워 입안에서 오래 되씹는 일처럼 듣고 지나쳤던 말씀인가 했더니 다시 되새기며 그 의미를 두고 오래 머무는 게 묵상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란 그렇게 된 일을 두고 마음이 접히지 않는다. 때론 무시를 하듯 내버려둔다. 나의 나 됨을 알기 때문이다. 더 나은 쪽을 염두에 두고 ‘~했더라면’ 하는 식의 미련을 거두는 일로, 자기에게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곧 그러한 자신을 인정함으로 ‘그런 나’로 주 앞에 선다. 사람들을 대한다.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며 행색을 갖추려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나’로 서는 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속된 말로 ‘생긴 대로 산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는 결코 자신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듯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남에게 눈을 돌리지 못한다. 저의 사연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다. 누가 누굴 돕는다는 말인가? 하고 관심을 거두게 된다. 이는 또한 역설적이게도 자기 이야기를 외면하면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남의 일에는 열심으로 나서면서 정작 자신은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남의 이야기는 죽음처럼 안전하다. 피 흘림이 없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기 십자가는 액세서리처럼 모양만 그럴듯하다. 그것으로 목걸이를 하고 귀걸이를 하고 다닌다.

 

아이가 아침 일찍 왔다. 아무래도 조부의 발인 전에 글방으로 보낸 것 같다. 같이 이런저런 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고 넓은 아량이 필요하다. 자칫 마음이 앞서면 혈기가 따른다. 기껏 점심을 같이 먹고 병원으로 보냈더니 한 시에 끝났다는 소릴 한다. 분명히 토요일은 오후 다섯 시까지 한다면서 괜찮다고 하던 녀석이 안산까지 헛걸음을 한 것이다. 덩달아 속상하고 화가 난다. 몇 번을 묻고 확신하여 그리 된 일이고 보면, 뭐라 한들. 저 속도 답답할 것을. 누구 일을 두고 은근히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숨은 부끄러움, 부담감 때문이다. 이는 우리 안의 죄성에 속한다.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가렸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선뜻 대답하고 나서지를 않았다. 누구 탓을 하고 ‘~때문이야’ 하는 억울함을 가졌다. 우리 안의 죄의 속성은 가린다. 감추고 덮어두고 ‘~ 때문이야’ 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어떤 일을 마주할 때 나 역시 내 안에 먼저 드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에 오늘 말씀은 이 모든 것의 답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먼저는 자기 십자가를 자기 아픔, 억울함, 어떤 부끄러움 정도로 받으면 안 된다. 시쳇말로 팔자소관도 아니다.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을 그리 해석하고 나면 할 말이 없다. 이는 두 관점을 내포했다. 주신 이의 뜻을 기리는 것과 자신됨을 한탄하는 쪽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 물을 것도 없이 숨기고, 가리고, 덧대어 아닌 척 하는 부분이라면 그리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다. 그게 아니라 내가 국사발이든, 간장종지든, 개밥그릇이든, 물 컵으로든 주가 쓰시기에 합당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나의 나됨에 대하여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에 따른 갈등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해탈을 하듯 어느 경지에 이른 도인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경우는 없다. 다만 그보다 높은 이치는 주께 돌리는 것이다. 가령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었고, 정당화할 수 있던 요셉의 경우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자신의 자기됨을 주께 돌렸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거기에 나는 없다. 나의 억울함, 수모, 수치, 자존심 따위는 버렸다. 다만 오늘의 나, 아주 마땅치 않고 누가 알면 안 될 것 같은 나까지도 스스럼없이 마주하고 누구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주 앞에 수긍이다. 받아들임이고 이 또한 훈장으로 삼는 믿음이다.

 

어릴 때 나는 종종 아버지의 훈장을 가난이라 여겼다. 조롱하는 마음으로다. 무책임하고 가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부끄러움으로 그리 생각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럼에도 주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야 했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 가령 내가 누굴 돕는다 그럼 오히려 안타까워하며 ‘저리 가 있어!’ 하고 손을 내젓는다. 어릴 때, 아마도 초등학교 어느 시절에 반 아이들이 단체로 기합을 받은 일이 있다. 다들 운동장으로 모여! 하고 화가 난 담임선생은 불호령을 내렸다. 그때 ‘넌 교실에 있어!’ 하고 나를 지목할 때의 그 무안함과 무기력한 심정은 지금도 아리다. 더욱이 운동장에서 벌을 받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비난과 비아냥거림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또 다른 몫이었다. ‘넌 좋겠다.’ 하며 욕을 섞어 말하는 아이들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린 내가 보이는 듯하다.

 

곧 우리가 사람으로 살면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어떤 허물을 두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거짓이다. 수십 년 나무 위에 앉아 생활하며 도를 닦았다 해도 해탈이란 없다.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 대신 남의 이야기에서 동질감을 얻는 정도로 만족한다. 영화산업이 부흥하고 드라마가 가정의 문화로 자리매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는 죽음처럼 고요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와 동질화하여 그 정도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더욱 외면하고 모르는 척 태연하게 구는 경우도 많다. 모두 회피다. 나 역시 나를 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살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요령은 주께 돌리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7-8).” 오늘 시편의 진술을 입안에 오래 머금고 되씹는다. 나의 므리바, 맛사에서의 반역의 세월이 치를 떨게 하며 주께 돌이킨다.

 

괜찮은 척,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카펫 밑으로 슬쩍 쓸어 넣고 눈에 안 띄면 그만이라 여길 때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잘만 어울렸다. 저들은 나를 낙천적이라 했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평가해주었다. 친구가 많았고 적이 별로 없었다. 종교가 무엇이든, 저들의 가치나 기준이 어떠하든 굳이 상관할 게 없었다. 덩달아 같이 어울리며 허용하고 내 삶에 반영하여 살던 것이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곯았다. 나의 영혼은 신음하는데 육체는 즐거웠던 시절이다.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8).” 주를 내 마음에 모시기 싫어할 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나의 그 시절은 저속하였고 조악했으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쾌락을 좇기도 했고 이를 화두로 낄낄거리며 몰려다니곤 했었다.

 

누구 일로 씨름한다. 공연히 마음이 쓰여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생각을 기울인다. 마음이 가고 감정은 저 혼자 들썽거린다. 아이 일로, 누구 이야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하듯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이 일에 마음을 쓰며 약까지 먹고 이러는 거야?’ 하는 의문이 든다. 할 때 오늘 바울의 진언,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는 예수님이 이르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으라 하신 말씀의 해설이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더 이상 내 문제로 나에게 더는 시달리지 않는다. 누가 알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 부끄러운데? 그게 나인 것을, 그런 나까지도 주가 귀히 여기시고 오늘에 두고 쓰시는 것일 테니까! 실은 이런 정당화도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기정사실을 두고 자꾸 사실인지 확인하고 점검하고 되묻는 일처럼 기운 빠지는 일도 없다. 설마 아내가 내 아내가 맞나? 하고 서류를 떼보고 확인하려 들지는 않는 것처럼. 그저 이제 나는 나다. ‘나의 나 된 것을 주가 아시나니’ 그럼에도 주께서 쓰시는 일이라면… 더는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만 있지 못한다. 상처는 아프지 않다. 불에 덴 자국처럼 흉터로는 남아 혐오스러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남들은 교회 같지 않다 해도, 누가 나를 목사로 여겨주지 않는다 해도, 넌 들어가 있어! 하고 무시당한다 해도, 그러려니, 저들의 그러는 것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직분이다. 내가 취한 명분이 아니고 이뤄야 할 당위도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다. 하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3).” 저를 내게 붙이시는 한 영혼으로 대하는 것이고, 내가 행할 게 아니라 주가 행하실 것을 아는 일이다. 아니면 주가 또 막으실 일이기도 하고. 누구 일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심하다 가만있기로 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어째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골 1:4).” 또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5).”

 

곧 내가 아는 복음은 하나부터 열까지 주가 이루시었다. 하여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6).” 그렇게 우리는 자기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고 외면하고 미루고 괜찮을 거야, 하며 카펫 밑으로 숨겨두기 일쑤지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주가 이루실 것이고 그리 다듬어가신다. 그러는 동안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스스로 알아서 하려 하는 동안에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일련의 어떤 사태를 전해 듣고 저들을 가만히 보면서, 그런데도 여전히 주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감정에만 치우치는 것에 대하여… 도무지 어쩔 수 없음이여! 그러니 세월이 약이려나? 살아서 사는 동안에 겪어야 할 일이라면…

 

이제 우리는 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하면 오늘 사도의 고백이 어찌 저만의 것이겠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 이에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25).” 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2-3, 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