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7-9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하나님은 늘 먼저 찾아오신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는 하찮은 존재란 없다. 곧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죄를 짓기 전에 가인을 먼저 부르시며,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7).” 하고 일깨우신다. 또한 야곱에게 일러,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이와 같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까지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장래의 일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세미하신 음성이 가슴을 뛰게 한다. 때론 여기가 어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 예수님은 곧 있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시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우리 눈이 감춰진 것을 두고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2).” 늘 당장의 일로 어려움을 겪는 데서 우리는 눈이 멀고 귀가 막혔다. 이와 같은 우리의 사정을 모르실 리 없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과연 내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때론 황량함을 느낀다. 누구보다 나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께서 오늘 나의 심령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오늘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말을 따라 그의 몸종 하갈에게 들어가 자식을 본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아내 사라가 단정적으로 그리 말할 때 왜 아브라함은 의지 있게 주의 뜻을 살피지 못했을까? 아내 하와가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서 주었을 때 어찌 아담은 이를 두고 안 돼! 하고 저의 잘못을 돌리지 못했을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밀착하여 이를 사랑으로 여기며 사는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저들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이게 아닌데, 싶은 판단력이 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약속언약을 직접 체결하였던 아담이 아무런 회의나 갈등 없이 하와가 건네는 선악과를 받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몸종 하갈에게 들어가 자식을 보려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지나친 밀착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게 반응하게 한다. 단적으로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하루는 사람들과 있을 때 누가 모친이 오신 것을 알렸다. 그때에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마 12:48).” 엄연한 선을 두셨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50).” 그뿐인가? 얼핏 들으면 모질기만 한데,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의 간청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사랑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모질고 야속할 때도 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이에 더 큰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자식을 죽여서라도 그 사랑을 이루시는 것이다.
가끔은 자식 일로 또는 아내로 인해 마음이 어려울 때, 요즘은 그것으로 속 끓이기보다 거리두기를 한다. 저들에게 뿐이겠나?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염려증에 시달리면 것도 골치다. 누가 고백한 말처럼 자신은 건강 염려증에 빠졌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금만 어디가 이상하면 벌벌 떨며 염려에 근심을 더하고 병원으로 전전긍긍한다. 어쩜 우리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 그 어떤 것과도 지나친 밀착은 오히려 화를 불러온다. 실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온 것도 엄밀하게는 형이 죽고 고아가 된 저를 불쌍히 여겨 그랬던 게 아닌가? 어디에도 하나님이 누구와 같이 가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 의미로 아담이 아내가 건네는 선악과를 받아먹을 때 정말 아무런 회의나 갈등도 없었겠나? 아브라함이 몸종 하갈의 처소로 들면서 정말이지 아무런 분별도 못했던 것일까? 현실적으로 저들의 논리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 16:1).” 하란을 떠나온 지도 벌써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브라함 나이 칠십오 세에 출발하였으니 사라의 나이로도 이제 그쯤 되어 생리도 끊겼다.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고, 이에 아브라함은 반박을 하지 못하였다. 아담은 어떤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아담이 그 모든 일을 처음부터 곁에서 함께 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들의 논리가 때론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자주 벽에 부딪치는 대목은 서로의 관점과 시각이 다를 때이다. 서로의 다름을 두고 뭐라 이르면 다툼이 되고 금세 속이 상하기도 한다. 그러느니 시키는 대로 한다고, 저들도 그저 그러려니 하였던 것이다. 앞서 예수님의 본을 잠깐 언급하였던 것처럼 해야 할 도리와 지켜야 할 사명은 서로 다른 것이다. 나는 사실 요즘 이런 일을 두고 자주 생각한다. 아내와 두 아이와의 가족관계에서 여느 것으로 허용하고 그러려니 하는 일은 그럴 수 있으나,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선을 긋지 못할 때, 죄는 늘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것은 모두의 기본이다.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죄를 죄로 인정할 때 용서를 구할 수도 용서할 수도 있다. 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죄는 일상이어서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여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그러할 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하나님은 언제든, 무엇에든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다만 이를 인정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어리석은 모든 과오로도 선을 이루실 때 용서는 극적인 것이 된다.
가령 모든 죄는 앞서 죄책감을 일으킨다. 요셉의 형제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서로 찔렸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곧 오늘의 현실을 그리 받아들이면서 죄책감은 일그러진 현실을 반영한다. 그럴 때 요셉의 놀라운 진술이 사랑의 참 이치를 묵상하게 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1-21).”
이내 분별없는 사랑은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와 이런저런 사달을 냈고, 몸종 하갈에게 들어가 결국은 아들을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저들의 파국은 결국 저들의 몫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서로의 불화도 사랑에서 비롯된다. 우린 너무 서로의 사랑을 미화하고 환상을 갖고 사는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서도 물론 자식이나 아내에 대해서도 옳지 못한 사랑은 엄연히 그릇 행하게 한다. 살며, 사랑하며, 배운다고 우리의 거듭되는 낭패와 실망감이 우리로 참 사랑을 알게 하는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이 찾아오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7-8).”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그야말로 파국 일로라.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 우리의 향할 길을 알려주신다. 하여 오늘의 시인은,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 39:1).
함부로 누구를, 무슨 일에 대해 뭐라 할 게 아니다. 그것으로 더 속이 터질 것 같고 근심이 더하기도 한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2).
그러한 괴로움이 곧 연마다. 자신을 훈련하는 일이란 자신과의 다툼에서다. 자아는 영혼을 뺀 것이다. 영을 생각하지 않고부터 자아만 남는다. 육의 일과 영의 일은 엄연히 다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이는 어쩌면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럴 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이와 같은 갈림은 완연하여서 아닌 건 아닌 것이지 아닌 걸 긴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엄연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그럼에도 우리 안에 은연중에 드는 허용이 저를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영혼도 상하게 한다. 성경은 단언하건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그러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
이 엄연하고 엄격하신 말씀 앞에서 주춤해야 한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위하고 내 자신을 돌보는 일이 그 이상의 것으로 ‘세상 사람들 다 그러고 사는 일’로 여겨 허용하고 만다면 아담의 선택은 번복되고 아브라함의 선태도 재연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간절함으로 고한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3-4).
나는 약하다, 별 거 아니다. 결코 옳지 않다. 옳을 수 없다. 내가 옳은 것은 주의 안에서 뿐이다. 다른 예외는 없다. 하면 자식을 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일도 주의 안에서다.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 별 거 없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6).
인생은 한 마디로 허망한 것,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
오직 주만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그러므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39:7).
오늘도 주 앞에 간절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0) | 2021.10.04 |
---|---|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0) | 2021.10.03 |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0) | 2021.10.01 |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0) | 2021.09.30 |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0) | 2021.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