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전봉석 2021. 10. 3. 05:3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 17:2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전능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의 소리를 들으신다. 이 두 사실 앞에 새삼 놀라움과 감사함을 올린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 30:2, 34:6, 17).

 

들음으로 고치고 구원하시고 건지시는 이시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곤고한 날도 허락하신다. 환난도 두신다. 그럭저럭 아무렇지도 않을 때, 괜찮아서 더는 주를 바라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동원하신다.

 

누구는 평소 믿고 의지하며 함께 하였던 이와 그 가족에게 배신을 당해 기어이 송사에 휘말리었다. 누구는 다 나아서 괜찮을 줄 알았던 자신의 불안이 새삼 쥐고 흔들면서 당황하였다. 누구는 기도를 부탁하며 그 사연을 말하고, 누구의 어려움을 들으며 새삼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심을 알려주었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

 

가끔은 고질적인 나의 감정이입으로 인해 듣고는 내내 속상하다. 기껏 저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힘을 북돋우고는 돌아앉아 나는 하나님께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주님, 하고 저의 사정을 안타까워할 때면 저에게 들려주었던 말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적용이 되어 위로가 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그 소행을 보고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토요일에 오는 아이가 채 한 달을 넘기면서 유야무야 역시 처음 보이던 성실함이 시들하여져서 뭐라 좀 일렀다. 이래서 애들은 가르치기가 어려운가했더니, 연이어 나이든 친구의 사연과 그의 어쩔 수 없음을 듣고 이는 평생의 과업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이 놀랍고도 엄청난 진리 앞에 굴복하게 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신 이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저가 결국 독생자가 되어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먼저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 세상은 어떠하든 멸망하게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종말이요, 국가적으로는 흥망성쇠이며, 인류적으로는 지구의 결국이다. 즉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멸망이고, 하나는 영생이다. 이는 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의 현실이고, 다음은 죽어서 나뉘는 길이기기도 하다. 이 땅에서 설마, 하던 길이 죽어도 이어진다.

 

결국은 여기 이 땅이 전부가 아니다. 누가 다시 공황이 엄습하여서 순간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워하다 전화를 하였다. 괜찮은 줄 알았고, 이제는 잘 이겨낸 줄 알았다. 그런 것이 하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 앞에서 훅, 하고 끼쳐왔고 순간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으니… 처음 사람 아담이 우리 후손들에게 남긴 죄의 소산으로 수치심이 가장 처음 것이면서 결정적인 게 아닐까? 저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려 해보았고, 이내 하나님은 저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과 함께일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눈이 밝아짐으로’ 고작 부끄러움을 겪는 일이라니!

 

우리 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게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의심과 저들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가까운 이로 인한 배신감은 물론 물질적인 손해와 그 위협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다. 곧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2-14).

 

그러니 의심 없이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신뢰하였던 일이 발등을 찍은 것이니, 말로 애원하고 부탁해도 안 되어 기어이 형제보다 가까이 하고 믿었던 이를 상대로 고소를 하고 법으로 해결하려 하니 그 심정은 오죽하겠나? 이런저런 저의 사정을 이 글에 서술할 수는 없으나,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일이다. 하나님보다 앞선 모든 것에 대한 결과다. 그 결국은 멸망으로다. 이 또한 하나다. 이를 우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려고, ‘하나님은 세상을-우리를-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인생? 우정? 사랑? 사람과 사람 사이, 세상과 사람 사이에서는 개나 물어가라 해라! 그러니 사람마다 개를 더 사랑하고 애완동물을 신주단지 모시듯 안고 싸매고 고이 품어 떠받드는 시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것도 사람 하나 키워 건사하는 일보다 몇 배는 더 비용이 드는 일인데, 그러니 돈 좀 있다 싶으면 하는 짓들 하고는. 아낌없이 쏟고 죽으려는 것이니 뭔들 자기만족을 위해 아까우랴.

 

그러니 자기 자식을 맡기고, 자기 영혼으로 의탁하여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교회에서 양육을 받는 일에 고작 헌금 얼마 내는 것은 아까워서 이리 계산하고 저리 미루다, 개 미용값만도 못한 감사와 개 간식비도 못한 후원으로 주를 사랑한다고 저러고들 믿는단다. 나도 누구를 가르치며 이를 교육비라 생각하면 아니꼽고 더러워서 받기도 뭐한 금액이다. 차라리 안 받고 가르친단 소리라도 듣지, 예전에 딸아이 임신하고 시작할 때 처음 교육비가 3만원이었다! 무려 30년 전 일이다. 오늘에서 그걸 받아들고, 이걸 감사헌금이라 여겨야지 교육비라 여기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 안의 수치심은 여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일대일 수업을 할 때 주 1회, 한 달 교육비가 그 값의 열 배였다.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마음이 들면서 또 다른 마음으로는 내 안에 여전히 멸망도 있고 영생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제는 아내가 이번 시험 끝나고 중3 아이 하나와 중2 아이 둘이 갈 텐데… 하고 말을 이었다. 이런저런 어려운 가정형편과 그 형편에 언감생심 논술-글쓰기를 따로 배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소리를 한참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희한한 것은 오라, 그래! 하고 나는 아주 흔쾌히 대답하였다. 이상하지? 할 수 있고, 충분히 알만한 이가 앞서 그랬을 때의 마음과 어찌 갚을 길 없는 형편이라 송구해하며 그래도 되냐고 누차 물었다는 저들 엄마들의 모습이 대조되는 것이다. 순간 주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알겠다. 누구는 한동안 성경을 써서 글방에 올리는데, 그게 저의 교회 무슨 특별기간으로 아이들 숙제라서 그랬다! 한데 내가 아는 ‘아픈 아이’는 매일 꾸준히, 절박함으로 성경쓰기를 하여 성경 일독이 아니라 올해 한 번 필사를 끝내고, 다시 잠언에서 전도서, 이사야로 달리고 있다.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에 계실지 알겠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두 마음이다. 멸망으로의 마음이 있고 영생으로의 마음이 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5).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야말로 인생이란, 도루묵이다. 잠깐 쬐는 불이다. 하루이틀 머무는 여관이다. 양반은 아무리 추워도 곁붙을 쬐지 않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도 잰걸음을 하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그렇다는데 주를 섬긴다는 사람으로 영생을 바라고 산다면서, 우리의 몰골이 참 말이 아니다. 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우리의 멸망을 두고 하나님은 역겨워하신다. 할 때에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고 납작 엎드려야 한다. 고객을 응대하고 상사를 모실 때는 잘만 숙여지는 고개가 어째서 교회만 오면, 주 앞에만 서면 그처럼 뻣뻣해지는 것일까? 아직도 광야 40년의 길은 참 길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다들 그러니 험악한 세월을 산다. 듣는 일도 고역이지만 저들 삶인들 오죽하겠나?

 

어제는 누구와 통화를 하고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다, 섣불리 주의 마음을 달라하고, 주의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는 큰일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주의 권능으로다. 결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7).

 

도대체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8).

 

우리 영생으로의 길은 다른다. 이를 보란 듯 오늘 말씀도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창 17:22).” 나 같은 자를 위하여 주가 말씀을 나누시기 위해 오신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

 

그 하나님, 나의 주가 이루실 것이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 곧 저는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저의 자녀라.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이 놀라운 진리의 약속 앞에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이제는 나도 확신하지 않던가? 여태 딛고 살았던 땅이 실은 멸망으로가 아닌 영생으로의 길로 주가 늘 함께 하셨음을.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복이고 참 은혜인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