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7 주일
시편 71편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지혜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지난 주일에 이어 다윗의 간구로 볼 수 있다. 저자가 불분명하지만, 노년에 이른 다윗이 지난날의 인생을 조망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어떤 미래를 예비하고 계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은 오늘 시편이 31편 1-3절, 21절의 내용과 유사함으로 알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곧 우리가 영원히 피할 산성을 바라보며 오늘의 우리로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하나님께 간구한다. 곧 오늘 우리가 여러 시험을 당하나 그 어떤 시험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지난 주일에 이어 69편에서도 ‘속히’ 주의 도우심을 구하였듯이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하는 간구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로서의 특권이다. 이는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도 마땅히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의 찬송은 여호와 우리 주 하나님으로 저는 우리의 “영원한, 견고한, 성소”가 되신다.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은 3연으로 나누어 1연은 1-4절, 우리가 어떤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피하면 된다. 2연은 5-16절, 삶의 간증을 근거로 우리는 노년에 닥칠 죽음이라는 가장 큰 위기를 넉넉히 통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3연은 17-24절, 우리가 나이 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경험적인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동시에 장차 누릴 ‘영원한 성소-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맛보기이다.
이와 같은 시의 구조를 따라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지혜’를 배우게 된다. 첫째, 언제든 인생에서, 특히 다급할 때에 우리는 주께 피할 수 있다. 둘째, 개인적인 구원의 간증은 인생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을 대비하는 지혜다. 셋째,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하루하루 살면서 사랑하며 배운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지혜를 붙들고 본문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 인생에서 주께 피하는 것이 지혜다(1-4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시 71:1).”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죽는 덴 순서 없고, 늙는 덴 오는 순서대로 나이 든다. 야곱이 노인이 되어 요셉에게 이르러 애굽 땅 바로 앞에 서서 저의 인생을 회고하며,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정의한 바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곧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인생인들 순탄한 삶은 없다. 모두가 ‘험악한 세월’로 산다. 에덴에서 쫓겨난 뒤 모든 인류의 숙명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과연 자신만의 벧엘을 소유하고 살고 있는지, 곧 하나님을 마주하고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를 최소한 하나씩은 가지고 사는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 35:15).” 오늘 노인이 된 다윗은 다급히 주를 찾으며 우리에게도 묻는 것 같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2).” 나의 공로나 어떤 자격으로가 아니다. 오직 ‘주의 의’로다. 이를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오늘 우리의 화평은 하나님과의 것이다.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가 아니다. 각자의 실력으로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그런 착각을 가지게 하는 세상이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지, 어떠하든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이것이 성경의 모든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알려주는 진리다. 이에 다윗은,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시 71:3).” 하는 확신으로 주께 피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2).
이것이 우리 믿는 자의 인생행로다. 때론 불의하고 악하고 흉악한 자들에 의해 세상이 좌우되는 것 같지만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시 71:4).” 우리는 그럴 때마다 주께 피한다.
둘째, 개인적인 간증이 죽음을 대비하는 지혜다(5-16절).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물이 아니다. 많은 종교가 이를 강조하며, 심지어 기독교에서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줄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우리의 선택은 모두 악할 뿐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것이 말씀의 정의다. 이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 주체도 본질도 모두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에 관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늙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이와 같은 고백은 경험에 의한 것이고 자기 삶에서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능한 간증이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인형뽑기’의 인형들처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를 강조하시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곧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에게 주신 것’으로, 어떤 몹쓸 죄악 중에서 살았다 해도 그 아들께로 나오면 ‘결코’ 내쫓지 않으시는, 곧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설교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히브리서 기자도 설교하기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즉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키는 것이 참 지혜다. 말씀의 경고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심지어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만큼 결연하고 실질적인 말씀으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란 뜻이다.
하여 오늘 다윗은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 자신의 늙음을 두고 주께 아뢰었다. 우리도 늙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모든 단절은 죽음으로 나타난다. 하여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4).” 하며 다윗은 기도하는 것이다. 몸에 배지 않으면 허사다. 처음만 어렵지, 한두 번 자신의 ‘벧엘’에 앉다보면 이것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곧 우리의 인격이 되고, 인격은 후에 저마다의 운명이 된다. 우리를 모해하고 욕하고 수욕 당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설교하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우리를 노엽게 하는 여러 근심들이 줄을 지어 닥쳐오곤 하지만,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를 받아서 바울 사도는 설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곧 저들이 내는 한 목소리의 지혜가 무엇인가?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시 71:16).” 살며 사랑하며 배운 우리의 경험,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우리로 이 세상 너머의 세상을 바라고 준비하게 한다.
셋째,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지혜(17-24절).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0-21).”
모든 인생은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는 곳이다. 이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신다.’ 이를 살면서 체험하지 못하고 사는 성도가 가장 불쌍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성도들도 허다하다. 자신의 벧엘, 그 간증이 없이 사는 이는 그야말로 바람 잘 날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이를 어찌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삶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산단 말인가? 바울은 이를 알고 비로소 고백하기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그런 뒤 저는 어찌 했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더는 생명조차 귀하지 않게 여기며 이 복음을 증언하는 자로 살기를 원했다. 곧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임을 알기 때문에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을 이루어간다. 그럴 때 당연히 세상에서 오는 어려움이 왜 없겠나?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럼에도 성경의 정의는 뚜렷하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를 오늘 다윗은 어찌 노래하고 있나?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 71:22-23).
곧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주를 찬송하고 내 입술로 이 기쁨을 외치며 내 영혼은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24).” 안 믿는 자들의 노년과 믿는 자로서의 노년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죽음과 안 믿는 자들의 죽음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같은 죽음으로 알고 이를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오는 말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우리의 결국은 승리다. 과연 그러한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질문을 준비하였다. 스스로 묵상하며 참고하여 보시길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1) 죄짐에 눌려 신음하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25).”
2) 자신의 죄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한탄하는가?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3) 구원을 위해 어찌할까, 하고 얼마나 궁리하며 살아보았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31).”
4) 믿음을 지켜가기에 노력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5) 얼마나 죄를 경계하는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오늘 우리는 노년의 다윗이 전하여주는 세 가지의 지혜를 살펴보았다. 욥의 신앙고백과 같이 아무리 오늘의 현실이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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