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8 주일
시 73편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우리가 실제 자주 느끼고 회의하고 갈등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믿는 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 악인들이 잘되고 강건함에 대하여.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불의가 득의하는 것들에 대하여. 솔직히 우리는 그로 인해 자주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보다 하는 안이함에 빠지기도 한다. 나름 열심을 다해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의 궁색함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사는 사람들의 잘됨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길이 아닌가?’ 하는 회의와 ‘그게 뭐 어때?’ 하는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를 오늘 성경은 가감 없이 기술하여, 우리가 가는 길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1:16-17).” 그래서 성경은 애써 아브라함의 회의나 야곱의 저열함이나 다윗의 부정함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였다. 곧 우리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그 누구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 세워, 이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은 다소 좀 긴 내용으로 서술되었다. 이를 4연으로 간략하게 나누어, 1연은 1-3절로 악인의 형통함으로 실족하기도 하는 게 우리의 실상임을 알린다. 2연은 4-12절로 그러나 악인의 형통과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3연은 13-17절로 그러한 악인들의 형통함은 일시적이며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마지막 4연은 18-28절로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고 우리의 확신과 신앙은 약속된 보상이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 시편은 아삽의 시다. 아삽은 다윗 왕 때의 3대 악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후손들은 성전에서 예배 때마다 수종드는 사역자들로 특히 시와 찬미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저들은 다윗 때부터 포로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이 귀한 사역으로 헌신하였다.
오늘 시는 그들의 첫 시편으로 매우 현실과 밀접한 소재로 쓰였다. 그래서 더욱 진솔하고 솔직하다. 시편 37편의 주제와 같다. 곧 의인이 고통당하고 악인이 형통한 것에 대한 부조리한 현실을 조명한다. 이를 종종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자체의 모순은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동시에 깨닫게 한다. 오늘 우리는 아삽의 시를 통해, 아무리 그 현실이 어떠하다 해도, 결코 변치 않는 진리가 몇 가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세상에서 형통함이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다.
‘여물을 먹는 소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상 그 어떤 권세도 각각은 주관적이다. 어느 것이 축복의 척도는 아니란 소리다. 싫든 좋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현상과 마음의 요동을 오늘 시편은 밝혀준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 73:1).” 곧 이와 같은 사실은 알겠으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의당 저들은 벌을 받아야 하고 그 저주는 현실에도 반영이 돼야 옳다. 그런데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 이를 보면서 우리는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더욱이 저들에게는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5-9).” 뭘 해도 잘되는 것 같으니,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증표이기도 하다.
보면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 악을 행하고도 이를 교묘히 숨기고 잘들 살아가는,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버젓이 우리 현실에 성립한다. 누구 말처럼 이번 대선은 마치 부패와의 전쟁이라 하는데, 정말 이 땅에 정의와 공의는 살아 있을까? 하나님은 어째서 저런 자들을 그대로 두실까? 아니 오히려 부와 명예와 권세를 더하시는 것일까?
성경은 이르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하시는 말씀이 우리로 더 어렵게 한다.
현실은 그와 같지 않아서 말이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어렵게 살고, 안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을 본다… 이때에 우리를 일깨우는 말씀 하나,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그럼 여기에서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곧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곧 우리로 옳은 길을 가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떠하든 선하시다. 이를 선명하게 해주는 게 고난이다.
셋째. 하나님의 유기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다.
다윗은 표현하길,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31).” 곧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한다. 오히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욥 12:6).” 그럼 무턱대로 복을 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오늘 시편의 주제와 같이 37편에서 다윗도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시 37:35-36).” 곧 저들의 형통함이 도리어 하나님이 버려두시는 저주였다. 바울도 우리에게 일러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고 하였다(롬 1:22-32). 하나님이 개의치 않는 인생이 다 저주다.
넷째. 하나님의 초월성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73:10-14).”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게 아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하고 하나님은 경고하셨다. 이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즉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현실, 불공정한 사회 가운데서 우리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로 산다(시 84:5).
다섯째. 깨달음 없는 말(言)은 자기 발에 걸린다.
순간 아차, 할 수 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73:15-17).” 그래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언제든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그들의 결국은 극명하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18-20).” 이 땅에서의 승패로 결정 난 게 아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다 지나면 허망할 뿐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성소-교회에 답이 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1-23).”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다. 단지 어떤 체험이 복이 아니다. 자신의 무지한 삶을 깨닫는 것, 욥은 고난을 통하여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하고 자신의 무지함을 회개하였다. 그래서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 73:23-26).” 결국 우리의 복은 주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7).”
그러할 때,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일곱째. 악인의 형통은 결국 일장춘몽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73:28).” 오늘 시편의 주제야말로 성경이 누누이 일깨우시는 진리다. 성경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것은 모두가 주의 말씀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저들 인생은 허무할 뿐이다. 하여 이를 깨달을 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84:10-11).” 하는 고백이 가능하다.
나오는 말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오늘 시편은 의외로 쉽다. 매우 진솔한 자기 고백적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읽기만 해도 그 의미가 전달이 된다. 곧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도대체 어떤 복인가?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91:7-8).” 하신 성경의 지혜가 우리의 무지함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하신 말씀을 강하게 의지하는 것이 지혜다.
세상 돌아가는 현상에 너무 곧이곧대로 반응할 필요 없다. 오늘의 정치와 그 진영논리에 덩달아서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현실이 그래! 남들 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 삼촌 스크루테이프가 웜우드 조카 사탄에게 그렇게 힌트를 주었다. ‘너무 원수들을 막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만 숨기고 있으면 돼. 그럼 저들은 선과 악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 그러니 조금 우려가 되면, 그럴 수 있지 뭐! 하고 툴툴 털어버리게 해! 네 잘못이 아니야! 응원하면서!!’ 사탄은 교묘하다. 어떻게든 우리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 그래서 적당히 선도 행하고 교회도 나가고 봉사도 하고….
이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의 중심을 강하게 붙들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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