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 74편 /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전봉석 2021. 12. 3. 09:38

211205 주일

 

시 74편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들어가는 말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1-22).”

 

우리의 믿음은 이해함으로 얻을까?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이러한 말씀을 어찌 우리는 이해와 상식으로 알 수 있겠나? 그러자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하고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두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영생을 두고 말씀하시니,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1).” 하고 물으셨다. 말씀이 사는 데 걸림이 되는 성도들도 많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신 28:6).’는 말씀을 복음으로 듣기를 원하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우리는 자주 이와 같은 사실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를 여전히 어렵게 하신다(요 6:63). 당연히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지…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어쩌면 이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믿는 자, ‘제자 중에’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 이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럼 그게 뭘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자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움만을 강조하기보다 슬픔을 자주 노래한다. 오늘 시편도 이스라엘 민족의 비탄을 탄식하며 지은 노래이다. 오늘 본문에 앞서 슬픔의 노래 애가를 인용구절로 먼저 읽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할 때, 이것은 무엇일까? 앞에 두 구절을 같이 읽어야 한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애 3:19-20).” 이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것이다. 무슨 종교가 이런 종교가 다 있나? 평안과 행복, 여러 복락과 희망을 안겨줘야 하는데, 곧이어 다루게 될 시편 76편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76:10).”

 

곧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된다니! 저마다의 앙금, 마음에 담고 사는 어떤 서러움, 억울함, 분함, 원망과 좌절을 통틀어 노여움이라 하면 이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한다는 소린데, 도대체 어떻게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찬송이 된다는 말일까? 마음은 성경적으로 믿음의 자리다. 믿음으로 이를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곧 우리의 소망이란 이해와 상식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인 믿음의 영역이다. ‘아버지의 뜻으로 행하는 자’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에 대하여 찬송이 나오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 시편 74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은 ‘민족의 애가’다.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을 주께 아뢰고 탄원하는 아삽의 시다. B. C. 586년 바벨론에 의해 함락당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지은 것인지, 이후 재건된 성전을 다시 B. C. 167년에 시리아 제국에 의해 훼파되는 사건을 두고 울분을 토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8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하는 것으로 보면 시리아에 의한 정복이 아닐까싶다. 회당은 말씀을 나누고 가르치던 교회들이다.

 

이를 슬픔에 찬 노래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탄원하기도 하였다.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2:6).” 곧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시는 시편 79편의 주제와 같다. 즉 ‘민족의 비극적 참상과 그에 따른 복수를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하면,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곧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오늘 시를 간략하게 보면 3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연은 1-11절로, 하나님의 선민들이 당하는 고통과 주의 교회 예루살렘의 참상을 진술한다. 2연은 12-17절로,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권능을 회상하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 3연은 18-23절로, 그러므로 주의 신속한 구원을 청원한다. 시적정황을 잘 기억하면서 다음의 사실 세 가지를 살펴보겠다.

 

1. 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1-11).

 

물론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곧 영생의 삶을 살 것이다. 그럼 이를 어찌 확신할까? 야고보 사도는 행함을 강조하고 베드로 사도는 사탄의 경계하며 바울은 이신득의 곧 칭의를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이다. 모든 문제는 죄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연 으뜸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래서 우리 육신은 늙으면 죽는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믿음은 쉽고 신앙은 어렵다. 거저 받았다고 거저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기본구원과 성화구원의 교리다.

 

누구보다 바울은 이를 두고 씨름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구원 받은 것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죄란 예외가 없다.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아니면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죄에 종노릇한다. 돈돈거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추구하느라 사는 게 지옥 같다.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사는 현실을 두고 하나님은 슬퍼하신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시인은 절규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1).” 이는 모두 죄로 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분단된 것도,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된 것도, 모두가 죄로 인한 것이다. 구원 받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돌아야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때 우리로 고초를 겪게 하시고 낙심을 허용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요셉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가만히 저의 삶을 상상해보자. 얼마나 그 속에 노여움이 가득했겠나? 그러나 저는 그 긴 시간,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이 죄로 인함이다. 이를 징계하심은 사랑이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즉 자식이 허튼 짓을 하는데 모른 체 할 부모가 어디 있겠나?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15).”

 

2.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희망을 회복한다(12-17).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12).”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징계하지만 세상과 같이 멸망하도록 결코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 말씀을 쉽게 옮기면 오늘 우리가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하여 판단 받는 것으로 주의 징계는 받지만 세상과 함께 정죄함 곧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지는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우리 영혼은 살리신다는 것이다. 곧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그 어떤 재앙도 사망도 멸망도 우리 영혼을 건드릴 수는 없다.

 

오늘 시편은 이를 덧붙여,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하고 노래한다. 그래서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우리가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은 나름 믿는다고 열심을 다했는데 그 결과가 뜻하던 게 아닐 때, 반대로 지난 주일의 말씀에서처럼 악인들은 뭘 해도 잘되는 것 같아 이를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은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일쑤다(73편 1-3).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들도 많다. 그렇게 배회하다 인생 황혼에, 부끄럽게 되돌아오는 탕자와 같은 주의 백성들도 많다. 하여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3. 고난 때에 ‘하나님께 성결’하는 자가 지혜롭다(18-23).

 

우리 인생의 답은 하나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22).” 우리의 이 부당하고 원통함을 주께 아뢰는 일, 이를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아론과 그의 제사장들은 흉패에 ‘하나님께 성결’이라 새겼다. 그리고 그 품에 우림과 둠밈을 두었다. 우림은 하나님의 빛을 둠밈은 완전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였다. 저들 겉옷에는 금방울과 석류를 달아 소리가 나게 했다. 곧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소리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출 28:30-34).” 이때 방울과 방울 사이에 석류를 두었는데, 석류는 평화와 안식 곧 풍요를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가졌다. 목사로 집사로, 어떤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든지 우리는 당시 제사장들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복음을 사수하고 증거 하는 사명을 가졌다. 이때 방울소리는 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역이라면 석류는 이에 필요한 일체의 풍요와 평안을 주가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이게 미덥지 않아 스스로 어찌 살 궁리를 하는 동안은 별 수 없는 것이다. 믿는다고 믿는데, 현실은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고달프다면 그 일체의 풍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는 다 맡길 수 없어 반반? 혹은 70대 30? 하나님께는 한 30%만 맡기면 나머지 70%는 자신이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다.

 

그러니 주의 대적이 어디 따로 있나? 자기 자신이 곧 원수다! 그 식구 중에 원수가 있다!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셨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두려워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너희가 참새보다 귀하지 않겠냐? 제발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주가 다 책임지신다는 데도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당장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고, 같이 살 집과 의복과 남부럽지 않게 자식들 건사해야겠는데… 그러니 어디 100% 말씀만 의지하고 살 수야 있겠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 보약이다. 별 수 없다. 사느라 사는 게 지긋지긋한 삶을 살며 그때마다 자신의 원통함을 주께 호소하는 수밖에!

 

 

나오는 말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시 74:18, 22).” 하고 우리는 주께 아뢸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특권인지, 주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속됨으로 괴로워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어쩌겠나?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렇게 분주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어떻게든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그러는 동안 주를 외면하고 멀리하면서.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가장 어려운 상대가 자신이고 다음은 가족이며, 그 다음은 친구고 세상에서 가까이 하는 나의 이웃들이다. 거기에서 우린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각자 모두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곧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이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이를 등한히 할 때 오늘 시편의 배경처럼 우리는 훼파되고 무너진다. 그렇게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4)” 결론은 하나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하면 우리의 기도는 주께 상달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시 74: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