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9 주일
시편 75편
기도의 능력
들어가는 말
신앙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추어 놓으신 까닭이다. 지혜자 솔로몬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고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하나님의 뜻을 살핌 곧 묵상과 기도는 우리의 영화가 된다.
우리의 기다림은 소망으로 감당하고, 소망은 믿음으로 지켜낼 수 있으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소망으로 사랑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도밖에 없는데 성령이 없이는 기도를 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존 번연의 표현처럼 ‘기도로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쏟아 붓는 것’이라 데 초점을 맞춘다. 곧 우리의 기도는 ‘야곱의 사닥다리’처럼 ‘하늘 문’이 열리게 한다. 기도로 우리는 신실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면 그만큼 하나님께 애정을 쏟는 일인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성령으로밖에 취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도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그 기도는 헛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우리의 기도는 모두 허상이다. 즉 하나님께 요구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먼저 본문을 살핀 후에 우리의 기도가 어째서 응답이 없는지, 왜 허상이 되는지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본문이해
시편 73편에서 83편은 아삽의 시다. 아삽은 다윗의 3대 악장 가운데 한 명으로 헤만(대상6:33)과 아삽(39)과 에단(44)이 대표적인 악장, 곧 예배 때 불리는 찬송을 지어 올렸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소망 가운데 겸손한 의인의 승리”에 대한 노래다. 시적배경은 뚜렷하지 않다. 역대하 14장 9-15절에 나오는 남유다 아사 왕 때, 구스군의 침공 때 지어진 시인지… 열왕기하 18장 13절에서 19장 37절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 때 지어진 시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러면서도 오늘 시편은 한나의 기도(삼상 1-10)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야의 기도(눅 1:46-56)와 그 내용이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본문은 모두 4연으로 구분하였다. 1연은 1절 한 구절로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찬송한다. 2연은 2-5절로 ‘악인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3연은 6-8절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찬송한다. 4연은 9-10절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확신함’으로 마무리한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신앙은 기도이고, 그 기도의 능력은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으로 가능하며 이는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다.
1. 기도는 감사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기도는 감사다. 감사는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것이다. 별로 감사가 없다는 것은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감사가 빈 마음에는 불평이 찬다. 우리의 감사는 정의와 인자와 겸손으로 증명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곧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주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이다.
곧 기도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로 죄악을 품고서는 그래서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7-18).” 그래서 예수님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누굴 의심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그 마음에서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결국 감사를 막기 때문이다. 감사를 하긴 하는데 누가 마음에 걸리고, 무엇으로 내키지 않을 때 이는 이미 막힌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곧 감사는 기도의 발판이고, 첫 마디 인사와 같다. 감사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의 증거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우선하였다(전 7:13).
이는 곧 믿음의 증거이며 신앙의 원천이다. 고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감사함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볼 수 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2. 기도는 말씀을 기초로 한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시 75:2-3).”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다. 땅의 모든 정한 기약이 정말 있을까 싶다. 한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이러한 말씀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대비하는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노아는 오직 주의 말씀으로 120년을 묵묵히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갔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소원들을 아뢰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그 하나님을 내 곁에 모시는 일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그러므로 우리의 축복은 주를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고로 신앙은 묵묵히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는 베드로와 같이 우리의 ‘신앙의 기술’은 말씀을 기초로 하는 기도다. 기도는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 막연한 기대나 어떤 바람 따위가 아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자기의 요구를 비는 것이다. 여기서 그럼, 우리의 기도가 왜 응답 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여 보았다.
첫째, 그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악함 때문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8).”
둘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셋째, 잘못된 것을 간구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넷째, 하나님보다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다섯째, 성령의 능력 없이 형식적으로 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오늘 시편은 이를 한 마디로 우리의 ‘오만과 교만’으로 들었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시 75:4-5).” 악인의 뿔은 저마다의 권위다. 자기성취고 자기만족이다. 말씀보다 우선하는 모든 기준이다. 곧 우리의 겸손과 정의와 감사가 사라지면 들어차는 자기합리화다. 그래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곁에 모시고 기도한다.
3. 기도는 우리 안의 썩은 것들을 비운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시 75:8).”
죄악을 품고는 기도가 나올 수 없다. 그 기도는 가짜다. 자기 위안일 뿐이다. 우리의 기도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곧 우리의 통회와 자복을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감사와 회개가 같은 축으로 연결되었다. 엄연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막 2:17).” 곧 자신의 연약함, 스스로 환자인 것과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기도한다.
죄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즉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으로 눈이 높은 것과 교만을 물리치시는 것은 겸손이다. 악인의 형통은 풀의 꽃과 같이 곧 지나간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그래서 성경은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견물생심이라고 부자가 되면 누구나 거드름을 떨게 돼 있다. 그런 자는 기도를 잃어버린다. 이에 우리가 구할 것은 은혜이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나오는 말
4. 기도는 곧 찬양이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시 75:9-10).”
이제 다 눈치를 챘겠지만 스스로 자기를 낮춘다는 겸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일이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시기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곧 악인의 뿔은 상할 것이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릴 것이다. 뿔은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우리가 이 땅에서 쌓은 공적은 모두 불에 타고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모두가 주여 주여 하였다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는다면, 오늘 나의 기도가 또한 신앙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돌아보아야 한다. 반드시 그때에는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곧 우리가 누릴 천국이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좋고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기도, 곧 이 땅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연장으로 영원히,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즐거움으로 영생을 누려야 하는 곳이다.
우스갯소리로 누구 말마따나 그렇게 무료한 천국보다 별의 별 악한 것들이 다 모여 있는 지옥이 훨씬 더 생동감 넘칠 수도 있다! 즉 자신의 쌓은 공적이 없이는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다르다. 이를 단지 이 땅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차등이니 차별로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직 우리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때에는 완전한 육신의 몸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는 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우러르며 주의 영광을 누리고, 복되고 즐거운 날들을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때 오늘 우리가 심은 감사와 섬김과 영화로움이 우리를 더욱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에, 우리가 오늘 맛보는 ‘이것’ 곧 기도의 능력은 주의 이름을 가까이함이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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