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2 주일
시편 77편
내가 내 음성으로
시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 77: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들어가는 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신년예배를 드리며,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우리 모두의 한해살이 동안 삶의 중심이 되기를 기도한다. 새해가 되면 모두들 새로운 각오를 한다. 그리고 여러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어떤 목표를 정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시 허락하신 한 해의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가짐, 즉 ‘영혼가짐’을 갖게 할 것이다.
곧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어둡게 짓누르는 여러 암울한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어찌 중심을 잡을 것인가? 자연재해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온갖 사건사고는 연일 끊이지 않으며, 전염병은 창궐하여 몇 년째 우리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그뿐인가? 덩달아 적그리스도나 이단들은 극성이고, 교회도 교회다움을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한데 예수님은 수천년 전에 이미 경고하셨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그뿐인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오늘 우리 현실 그대로 아닌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7).” 이와 같은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는데,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8).”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본문 이해
이에 오늘 시편은 그러한 난관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찌 점검하고 돌아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한다. 오늘의 주제는 <고난의 밤에 부르는 노래>라 할 수 있겠다.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아삽의 후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지은 시로 추정된다. 오늘 시는 간단하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1-9절로 극심한 환난중의 호소가 드려지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후반부는 10-20절로 그러한 어려운 중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어찌 인도하셨는가를 회상하며, 결국 하나님의 선민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송한다. 이는 개인의 고통에서나 민족적인 환난에서도 동일하다.
오늘 시편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끈질긴 인내의 신앙’을 갖자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신앙보다 친밀하다. 친밀한 죄성을 끊는 데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인내를 발판으로 해야 하는데, 믿음의 인내는 기도뿐이다.
1. 내가 내 음성으로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77:1).”
실은 오늘 본문의 핵심 어절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기도하는 일. 기도에는 남을 위하여 하는 중보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기리며 하는 도고기도가 있다. 성령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도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이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다.
중보는 남의 입을 빌려 남이 해주는 것이면 도고는 자신의 입으로 ‘내가 내 음성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크게는 같은 의미이겠으나 누구를 대신하여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뜻을 헤아리는 일도 그의 섭리를 먼저 구하는 일이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절박함에서 온전하여진다. 가령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저 여인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가나안 여인이었다. 주님은 저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여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는 저의 간청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고 여자에게 모멸감을 주셨다. 비참하고 비통한 대접이다.
한데도 여인은 스스로를 개라 일컫는 것에 개의치 않고 주께 애원하였다. 소위 기도는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위신 따위는 모두 가증하다. 뭔가 화려한 미사어구로 또는 변조된 멋진 목소리로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여 회개한 적이 있는지, 안 믿는 가족들을 위해 애간장이 녹아나도록 절규하며 기도한 적이 있는지… 하다못해 응급실에 실려 가도, 살려달라고 하며 미친 사람처럼 도움을 구하는 법인데, 과연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다른 어떤 위로도 모두 거절한다. 오직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 22:7).” 하는 신앙적인 체험이나 고백이 우리에게는 있는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건조하고 냉랭한 까닭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 그렇게 간절하게 주의 도우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저 다 우연으로, 어쩌다 그리 된,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그럼에도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의 신앙인들이 정말 의외로 많다. 자기만의 확실한 음성으로 주를 부르며 회개하고, 간구하고, 절규한 적이 없다는 소리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하시는 말씀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감상적인 믿음 정도로 여겨지고 믿겨진다면 다소 심각하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야곱은 죽기 살기로 기도했고, 결국 환도뼈가 꺾여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할 정도로 절박하게 주의 도움을 구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5).” 평생 일구어온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해도,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러한 심정으로 주를 바란 적이 있던가?
오늘 시인은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77:3).” 하나님을 기억하는데도 불안하고 근심하여 심령이 상한다. 즉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기며 살 수 없다. 그렇게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4).” 하면서 주의 필요성을, 주가 함께 하셔야 함을 애원하고 갈구하여본 적이 있나? 아니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불안뿐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5-8).” 하나님으로 인해 불안해 한 적이 있는가?
겉으로만 흉내 내다 욥의 아내 꼴 되기 십상이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멀쩡히 구원 받았다고 여기다 롯의 아내 꼴 되기 십상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에 자신이 속는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손짓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2. 말씀 묵상의 힘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2-13).”
자주 언급하는 바, 말씀이 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면 뭐하겠나? 성경은 박물관에 보관된 전시품이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다. 우리 실제의 삶이다. 뜯어 먹어야 하고, 내 이야기로 실감이 나야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면 뭐? 모세가 아무리 훌륭했어도 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면 뭐? 그게 도대체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누구 말마따나 그런들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과연 우리에게 말씀은 생의 최전방에서의 방공호 같은가? 몇 날 며칠을 굶주려도 뜯어 먹고, 마시고 버틸 수 있는 영혼의 생명수인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이와 같은 말씀이 그저 계약서로 어디 금고 안에 처박혀 있으면 뭐하나? 내가 그 집에 살아야지. 그 집 식탁에 앉아 음식을 해먹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어야지?! 말씀이 그저 문서인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이러한 말씀으로 나는 먹고 쉬고 또 한 해를 맞이하고 있는가?
오늘 시편은 묻는 것이다.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시 77:14-15).” 과연 자기 삶에서 ‘주의 기이한 일’을 체험하고 경험한 게 있는가? 오늘도 여전히 그 말씀으로 하루를 살고 또 그것으로 먹고 싸고 새 힘을 얻는가? 일주일 내내 성경 한 번 안 봐도, 말씀 한 구절 되뇌어 묵상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저의 영혼은 죽었거나 연명치료로 혼수상태이거나… 우리의 영적 침체란 그 진단이 아주 간단하다. 하루 이틀 굶고도 별로 배고픈 것을 모른다면 그게 어디 산 것이겠나? 하다못해 피조물들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6-19).” 자연도 이처럼 증거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사람들이 말씀 묵상 없이도 잘 산다? 그건 거짓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20).”
나오는 말
오늘 새해 첫 신년예배의 주제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내 음성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는가? 과연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그게 아니라면 죽은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성경은 이리 분명하게 증거 하시는데, 어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여기서 혹하면 그리로 쓸려가고, 저기서 혹하면 그리로 쓸려가고, 평생을 자기 필요에 의해 찾는 하나님은 여러 종교 중 하나이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어떤 어려움, 역경 가운데서도 주를 신뢰하고 ‘내가 내 음성으로’ 주께 기도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붙들고 산다는 일은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하는 자기 고백과 확신이 반드시 따른다. 미덥지 않고 막연하면 갈팡질팡 이단에 휩쓸려 평생을 배회하거나 자신의 아집과 교만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다 일생을 다 허비한다.
오늘 시편은 말하길,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9).” 즉 그 물 위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해도 우리의 믿음은 그 길이 보인다. 이는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저들은 다 개별적이고 개개인의 신앙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며 살았으나, 분명한 공통점 하나는 믿음의 실상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떠났고, 노아는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120년이나 방주를 지었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3).” 이와 같은 고백이 각각 모두의 공통된 것이었다.
새로 주어진 2022년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5-6).” 하시는 말씀을 붙들고, 주께 소망을 두고 나아가자. 그렇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입을 열고 주께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7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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