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6 주일
시편 76편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시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시 76:12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들어가는 말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되게 하시고,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이 금하신다? 우리 안의 노여움이란, 나쁜 감정들-슬픔, 괴로움, 고통, 분노 등 정신과적인 질환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의 이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언뜻 이해가 안 가지만 바울의 사례로 보면 무슨 말씀인가 이해가 된다.
바울은 여러 개의 병을 앓고 있었다. 혹자는 무려 70여 가지 이상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란 별명을 붙였다. 본인은 그러한 자신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신앙, 육체의 질환은 죄로 인한 ‘사탄의 사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의 증거라면 우리가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다. 이를 지키게 하시려고 즉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두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온전한 신앙이다. 물론 바울은 사람이다. 자신도 육신의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이를 또 저는 이렇게 받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이것이 노여움의 역설이다.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된다는 고백의 진수다.
육신의 질병만 그런가? 요셉의 경우 그의 불우했던 상황은 상상을 초월한다. 저의 노여움은 앙갚음을 품고 살아도 모자랄 게 없다. 그러나 저의 찬송은 놀랍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즉 앙갚음으로 노여움을 분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 이는 결코 막연한 신앙이 아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오늘 시편의 핵심도 그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여움에 버려두지 않으신다. 당장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5).” 우리로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주의 자녀들이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하나님이 선민을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찬송이다. 시적 배경은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저들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무력화시킨 사건으로 추정된다. 앞서 75편의 시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 한 것에 대한 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본문은 3연으로 구분된다. 1연은 1-3절,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지키신다. 2연은 4-9절,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진멸하신다. 3연은 10-12절, 하나님의 백성은 이를 찬송할 의무와 권세가 있다. 곧 우리가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이러한 간증과 체험과 실제적인 삶은 필연적인 일상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이고 찬송이기 때문이다.
1. 어려운 현실은 우리 신앙을 진보하게 한다.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시 76:1).”
하나님이 알려지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른 시편의 고백으로 추론하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즉 고난이 있기 전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그 일상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한데 역경은 하나님을 알고, 앎으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즉 오늘에 겪는 어려움이 주를 알린다.
고난의 역설이다. 오늘 시편은 그러므로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시 76:2).” 즉 엉뚱한 데서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나름의 수고, 애씀, 노력과 헌신? 그것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안 믿는 사람들도 같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즉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위로로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3).”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다루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8).” 히스기야 왕의 말이다. 이런 확신과 고백이 없다면 구해야 한다. 개인적인 만남, 하나님과의 동행이 없이는 그 신앙이 살아 있다 할 수 없다.
2.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두려움을 이겨간다.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시 76:4).”
감히 하나님께 대적할 게 무언가?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문맥적으로 보면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약탈하신 것 같으나 본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땅, 아브라함의 땅이다. 곧 이 땅의 평화란 잠시 얻는 휴식이지 영원한 안식이 아니다. 그러나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 이런 고백과 찬송은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찬송이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렇다고 저들이 아무런 역경도 없이 살았겠나? 모세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에서 40년을 은둔하였다. 이사야는 이세벨을 피해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랐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모두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다.
그러한 연약함이 교만일 수 있다! 자신은 못하겠다고 그리 도망치는 게 겸손이 아니다.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5).” 즉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은 스스로 마음을 정하는 일이다. 때론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모세의 거절이 겸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불신앙적인 교만이다.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지혜자의 말이다. 이에 오늘 시인도 이를 일깨운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시 76:6).” 하나님이 하신다. 마치 우리가 뭘 얼마나 준비해야 그것으로 하나님이 밑천삼아 일하실 것 같지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오늘 시편은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 감히 그 누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겠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 놀라운 섭리를 알고 믿고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곧 오늘의 시편처럼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8-9).” 하나님으로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세계다.
3. 우리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른 허용이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76:10).”
먼저는 기복신앙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하는지?’ 즉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섬기는지,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자신을 수단으로 내어드리는지!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욥 24:24).” 안 믿는 자들도 회환에 젖어 말하길,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 하였다.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는 허망함을 노래하는 것인데, 그 허망함에 대하여는 말할 게 없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였으면 뭐하나?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7).” 이것이 인생의 정의다.
악인이라 하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닌 수단으로 하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름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그게 다 가짜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코로나 핑계로 예배는? 교회는? 혹시나 하고 멀리하면서 세상 유익과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는 오만 군데 안 돌아다니는 데가 없다! 그러고는 주일에 한 시간, 그나마 방송으로나마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고가는 출퇴근길에 기독교방송이나 찬양을 듣는 것으로, 주여 주여 하니!
나오는 말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 76:11-12).”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안다. 행함은 관심으로 안다. 관심은 그 사람의 됨됨이며 추구하는 삶이다. 저가 하는 말, 늘 어울리는 사람들, 열심을 다하는 일의 성격, 그의 목표와 꿈이 곧 저의 신앙의 척도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묻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결국 우리의 평소 습관이 인격이고, 인격이 그의 운명이다. 성경은 이를 알려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오늘의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주께 찬송하게 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것이 우리의 노래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서원을 갚아 자신을 예물로 드려야 한다.그러할 때,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78편 / 완전함으로 기르시고, 능숙함으로 지도하신다 (0) | 2022.01.07 |
---|---|
시편 77편 / 내가 내 음성으로 (0) | 2021.12.31 |
시편 75편 / 기도의 능력 (0) | 2021.12.17 |
시 74편 /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0) | 2021.12.03 |
시 73편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0) | 2021.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