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 1:19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 140:12-13
민수기란 숫자세기를 의미한다. 숫자를 세어 각 지파마다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를 세고 또 센다. ‘20세 이상 된 남자’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선별한다. 저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가진다. 숫자세기는 생활태도와 직결된다. 안이하게 누가 어디에, 몇 명이 되는지조차 모르고 산다면 언제 어떤 일에 대응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는 태도의 문제이고 순종을 위한 준비이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2-4).” 그 가운데 레위 자파는 성막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저들은 계수에서 제외하였고 따로 그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레위인은 그들의 조상의 지파대로 그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47-53).”
각 12지파에 지휘관을 세웠고, 하나님은 마치 전열을 가다듬듯 전투태세로 저들을 숫자를 세게 하셨다. 하나님의 군대로 곧 하나님의 전쟁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몸으로 정비하셨다. 이를 아주 먼 훗날에 바울은 영적전쟁으로 간주하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일정 기간 우리는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이러한 긴박함에서 안이하여졌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와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자들과는 그 삶의 자세가 다르다. 오늘 말씀에 이에 따른 우리의 수행을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민 1:19).” 때는 출애굽하여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격할 시기가 되었다. 가는 도중에 행여 전쟁에 휘말릴까 하여 에둘러 가게 하시기도 하였던 노정이다. 이제는 맞닥뜨려야 한다. 직접 맞서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날과 같이 안이함은 저들의 최대 적이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한다. 곧 죄는 우리를 조롱한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죄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 믿음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내부적인 게 아닌 외부로부터다. 그러할 때 공의와 죄는 대적한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공의는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의 전쟁의 명분이다.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겔 22:4).”
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회개다. 죄를 인정하고 고하고 주 앞에 내어놓는 일, 그것은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에서 영광을 기대하게도 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사 66:5).” 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2).
회개하고 자복할 수 있는 마음의 정비가 필요하다. 이에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실 것인가를 뚜렷이 알리고 있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새삼 멈추고 한참을 되새기게 된다. 이에 따른 하나님의 백성, 그 자녀에 대한 참 사랑을 알 수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시 79:5).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그의 자녀임을 증명한다.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길,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94:12-13).
가령 아이들이 오늘 올지 어떨지. 아내는 아이들 엄마가 원해서도 아마 시작을 하긴 할 걸? 하고 귀띔을 하였다. 그렇듯 그저 남이면 굳이 두려워할 리도 없다. 엄연히 그 관계는 설정이 나뉜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마냥 좋기만 할 땐 버릇이 없고 그 말의 권위도 없다. 이때 어떤 잘못을 뉘우치면,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스 9:4).”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의 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을 살피게도 된다.
누가 곁의 누구로 인해 마음이 상했다. 나름 신경 쓰고 그래서 희생도 감수하는데 저의 태도나 마음가짐이 우리를 힘들 게 할 때도 있다. 즉 저들의 그릇됨이 우리로 바른 자세를 유도한다. 하여,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10:3).” 즉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죄의 영역도 개별적인 일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이와 같은 기도는 아무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누구에 대한 어떤 마음이 그저 연민으로 또는 안타까움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아닌 것을 두고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사이는 애초에 가망이 없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8).
이처럼 문제의 근원은 서로 같으나 엄연히 다르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우리로서는 저들의 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이는 모두 각자의 몫으로 서로는 별개다.
더욱이 부모 자식 간의 일에서는 그 죄에 대하여 서로에게 책임을 대신 묻지 않는다. 각자의 행위로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어쩌겠나? 누가 누구 일로 안타까워하며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돕고 있다. 한데 이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 상대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있다. 그 일로 상처 받고 마음이 좋지 않아 힘들어하면서도 애쓰는 이에게, 나는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는 그저 마음으로만 행할 일이 아니라,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0-42).” 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희생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여 그 일로 저가 혹시 주의 사랑을 그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 수 있다면, 그러나 이 일에는 우선순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모든 의가 의는 아니다.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산다고 다 선한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누구를 두둔할 일도 비난할 일도 없다. 그 기준은 언제나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선은 이 말씀의 저자는 엄위하신 분이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2:4).” 반드시 아닌 건 아니라 말해야 할 이유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3:11).”
말씀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 이는 짐승과 같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이들은 그 엄마를 무서워할 줄도 안다. 자기 멋대로 굴게 두면 저는 남이다. 굳이 남의 자식 뭐라 할 거 없고, 자기 엄마가 아닌데 저가 야단치는 소리에 따를 건 없다. 그렇듯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전 8:4).” 감히 아뢰어 함부로 가타부타 대들 상대가 아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 29:4).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한 번쯤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 그 정체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는다. 이에 상대적으로 말씀은 우리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이를 듣고 의식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가 복되다.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이에 진리의 글로,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단 10:2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이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19:9).” 한데 오늘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이에 응하는 자가 적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어쩔 수 없는 덴 또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종종 친구와 통화할 때 저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뭐라 하면 ‘네가 있잖아!’ 하고 말씀에 대해 말해주는 나로 족하다는 식으로 듣고 만다. 그러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이와 같은 진가를 정녕 알아볼 때가 오기는 오겠지… 하고 나는 저의 더디고 무딘 마음을 두고 주를 생각한다.
나에게도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누가 말씀으로 궁금해 하고 이에 그 관심을 보이는 일이다. 성경이 매면 하늘에 매이고 성경이 풀리면 하늘이 풀린다는 것을 나는 이제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우선으로 여기게 된다. 누군 이 묵상글에서도 성경은 뒤로 하고 나의 사적인 사연이나 나름의 문맥에 관심을 두곤 한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소 많이 적은 글에 대해서는 관심도 큰데, 말씀이 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훌훌 건너뛰는 경우도 많다. 저의 그런 말에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는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잠 13:13).”
이것으로 곧 진리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7:4-5).
이를 알면서 나는 가급적이면 말씀을 전할 때도 예화를 거둔다. 비유로 들던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피한다. 우린 참 어쩔 수 없는 존재여서 정작 말씀은 본문도 어딘지 까먹었는데 예화로 들은 어떤 이야기는 기억을 하곤 하니. 그것으로도 은혜라 하기에는 말씀의 엄위하심이 너무 귀하다. 하여 지혜자는 실질적으로 부탁하기를,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말씀이 기준으로 삶은 마치 시청각교재 같다. 나의 불안정한 행실은 물론 크고 작은 사회 사건이 모두 말씀의 예가 된다. 이를 보고,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이다. 이것이 모든 글쓰기의 소재이고 글감이란 것을 오늘 아이들에게 전하여야 하는데… 딸아이 나이 만큼이나 아이들을 가르쳐왔으면서 새삼 이리 신경을 쓰고 마음을 두는 것은, 이제는 저들 한 영혼을 바라봄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매일 우리 부부가 기도하는 게 그것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아이들로 자라는 저 아이들을 위하여, 인성이니 어떤 지적능력이니 하는 정도로는 이제 교육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기도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안 믿는 저들 부모를 대신하여 그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마주한다는 일.
우리의 사명은 오늘 본문과 같이 다소 긴장되고 그 숫자를 계수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하는 주의 병사들로 여겨져야 한다. 이때,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 140: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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