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전봉석 2022. 1. 13. 05:2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민 2:34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삶을 사랑한다는 일은 정리정돈의 문제가 아닐까? 정리정돈이란 주변을 관리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어수선하게 두지 않고 있을 것을 있을 자리에 놓고, 쓸모없는 것은 과감히 나누거나 버린다. 곧 혼란한 것을 바로 잡는 일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행하셨던 일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를 보고 보시기에 만족해하시는 것, 얽히고설킨 우리 이야기에는 그래서 정리정돈이 필요하다. 오늘 본문은 이를 연상하게 한다. 오합지졸 한데 뒤섞인 무리를 각 지파와 가문에 따라 나누고 계수하여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기호나 휘장을 세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민 2:34).”

 

아이들이 왔다. 먼저 기도를 하고 잠언을 같이 한 장 읽기 전에 ‘자유연상’에 대해 설명하였다. 무엇을 통해 어떤 것을 연관 지어 이를 연상함으로 글을 주제를 찾거나 이뤄가는 일. 나는 이를 우리 생활의 ‘규칙적인 삶’으로 비유하였다. 규칙적인 생활은 ‘뭘 하지?’ 하는 공백을 최소화한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피하게도 한다. 살면서 우린 얼마나 자주 돌발 상황에 부딪치곤 하는지. 그럴 때 당황하지 않게 하는 것도 ‘늘 해 오던 일’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유익하다.

 

가령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눅 22:39-40).” 곧 주님의 기도하기가 그러하였다. 곧 습관이란 규칙적인 생활이다. 규칙은 정리정돈의 기본이다. 흐트러짐을 막거나 이를 새로이 다스린다. 하면 우리는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살까?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보면 질서 없는 이의 생활이 문제를 유발한다. 것도 그럴 것이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어떤 일로 새삼 발이 걸려 넘어지곤 하는지… 보면 그게 다 평소의 무질서한 생활 태도 때문이다. 그런 이의 특징은 돌발 상황이 여기저기서 툭툭 불거진다. 뭘 해도 늘 끝이 없다.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아서이다.

 

아이들과 같이 잠언을 한 장 읽고 어느 구절의 말씀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지, 그 뜻을 살피고 자기 생활과 연관 짓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매일 하루 한 장씩 꾸준하게 하기를 권하였다. 물론 거기에 따른 상을 걸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평소 같으면 정오가 다 되도록 늦잠을 잘 텐데 오전 10시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다. 이를 또한 중히 여기며 정리정돈의 제 일 순위는 시간을 관리하는 데 있다. 이에 도움을 주는 게 글쓰기와 책 읽기인 것을 연관 지어 설명하였다. 생각보다 흡수가 빠르고 이해가 쉬운 듯하였다. 문제는 실천인데 그에 따른 동기부여로 상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이들과의 첫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교회 다니던 아이들이라 먼저 기도하고 성경으로 텍스트를 삼아 같이 말씀을 나누는 것에 크게 반감이 없었다.

 

오늘 민수기의 숫자세기 곧 정리정돈의 말씀을 나는 그리 이해하며 연상하였다. 어떤 규칙이 뚜렷하지 않으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휘둘리고 흔들린다. 물론 우린 우리 의지로 이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니 혼자 두시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님은 우릴 위해 중보하신다. 중보는 제 3자의 기도다. 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씨름하며 대신 주께 아뢴다. 성경은 엄연히 주가 날 위해 기도하심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우리가 주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그 길이 곁길로 빠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를 돕는 이가 계시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나는 이를 붙든다.

 

아이들이 어디 하란다고 하겠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하게 하시는 이가 계심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5).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연명하고 주가 더하시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일 텐데,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내가 글방으로가 아닌 교회로, 선생으로가 아닌 목사로 아이들을 대하며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올지 안 올지, 할지 안 할지, 나는 다만 전하고 이를 연습할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일 뿐! 무슨 이야기 끝이 아이들이 교육비는…? 하고 묻기에 따로 받는 게 있다고 웃음으로 아이들에게 답하였다.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일과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활을 정리정돈하며 살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주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저 아이가 궁금해 한 돈 이야기는 가소로운 것이다. 세상은 돈을 위해 사나 우리가 하는 일에는 돈이 알아서 채워진다.

 

지난 한 해도 넉넉하였다, 하고 감사가 나온 것은 엊그제 기부금영수증을 꾸려주면서 드는 풍족함에서였다. 세상은 그 금액이나 남은 수익으로 이를 계산하겠지만,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4).”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를 알면 알수록 말씀은 온통 날 위해 하는 말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20).”

 

누구의 어떤 문제, 또는 다른 어떤 이의 무슨 사정을 듣다보면 이는 다 정리정돈의 문제다. 그렇다면 정리정돈에는 그 구심점이 필요한데, 우리가 말씀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은 <네 가지 확장>을 위한 일이다.

 

첫째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어떤 일,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서도 우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평소 우리의 정리정돈의 길이 그리로 나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7-8).” 예수님도 그리하셨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도 그리함을 주는 알고 계셨다. 우리가 주를 의지함이란, 예수님의 믿음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9).” 곧 내가 주의 자녀로 택함 받은 데 따른 확신이 있다면 이는 그 증거로 주가 책임지실 일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또는 누구의 어떤 일에 끼어들듯 함께 하는 것도 이제는 다 이런 확신이 있어서다. 곧 이는 내 일이 아니다. 아쉬운 건 하나님이시다.

 

둘째, 날마다 자신의 죄사함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우리 삶의 우선순의가 무엇인지 알면 회심 후에 안이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믿는 자들의 가장 무서운 적은 태만이다. 이제 됐다, 여기는 안주하는 마음이다. 그래서들 스스로 믿는다고 여기는데 그 믿음이 실은 가짜이거나 날 수 없는 종이 비행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 5:3).”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치우고 또 치워도 치울 게 끝도 없는 것을 안다. 이를 한탄하지 않는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셋째, 은혜를 은혜답게 더욱 확실하고 견고하게 보존한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본문을 읽어도 저들이 신랑을 기다리며 다섯은 당장 서둘며 급선무를 따랐으나 다섯은 예비하여 기름을 따로 준비하였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 25:2-4).” 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주변을 정돈하며 사는 삶이 왜 가지런한가, 하는 것은 앞서도 연상하였던 사탄의 계교를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넷째, 평소의 습관은 인격이 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곧 내가 이제 누구와 대화를 하거나 글쓰기든 성경공부든 할 때면 말씀을 우선으로 하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말괄량이 삐삐’의 별장 같이 난장판인 생활을 바로 정돈하는 일이다. 그들로 말씀을 지키게 하는 일은 주가 성령으로 그 안에 함께 하심이겠으나 나는 그 것으로 저와 가까이함으로 나 또한 주를 의뢰함이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주님의 기도가 어찌 나의 삶에 응하여지는지, 우리로 그 증거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는 먼저 사람에 대한 연민의 고리를 끊는다. 연민은 누구를 사랑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우리 감정의 신진대사이다. 끌림과 홀림에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그것인데 이는 사랑이라 인식하기 이전부터 나를 이끄는 감정의 토대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면서도 이것이 늘 훼방을 한다. 나는 누구에게 ‘아닌 건 아니다!’ 하고 수차례 강조하는데도 저는 이 말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 ‘그래놓고도’ 그이가 좋고, 아이가 귀해 또한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허용하고 무너진다. 늘 그 감정은 잠깐 좋다 말고 실망하기 일쑤다.

 

이에 또 우리의 영적인 정리정돈의 중요성은 장차 누릴 영광을 위해서도 필수다. 성경에도 늘 나타나지만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막무가내로 일하시지 않는다. 즉흥적이지 않으시다. 이는 오늘의 나, 이번 일, 어떤 상황도 앞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곧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어쩌다 그리 놓아두신 일이 아니다. 내가 이제 누구에게든지 자신 있게 나의 나 된 것을 자랑하듯이 확신하는 것은 나는 허술하고 무지하나 주께서 그런 나라도 이미 창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일로 오늘을 건사하고 계신 것이다.

 

마지막을 우리의 정리정돈, 질서 있는 삶의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에 들어가서도 필수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위한 우리의 인격보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내가 저 아이들을 대할 때 단지 지금 중2, 혹은 고1, 그 나이의 일로 전부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일은 끝내 주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시인의 간구는 예사로운 게 아니다. 예수님도 일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지금 여기, 오늘의 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곧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19:19).” 우리의 이런저런 존재의 이유는 주를 알리고 나타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성령의 감동 아래서 주께 아뢰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렘 15:15).

 

단지 우리 생이 여기서 그게 전부라면, 굳이 오늘이 오늘 일로 끝나는 것이라면 굳이 뭘 그처럼 간곡할 필요가 있겠나? 주는 반드시 들으신다. 그리고 응답하신다.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시 79:11).

 

나는 이미 어떠했어도 마땅했을 자인데, 이는 모두 주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라. 쓸모없는 나를 오늘에 세우시고 새로 아이들 넷이 와서 처음으로 같이 기도로 시작하고 성경을 한 장 읽고 이를 자신의 생활과 연관 지어 스스로들 글로 썼다. 나는 누구에게든 이와 같은 글쓰기를 권하는 까닭은 묵상글이 주는 유익과 그 은택을 나는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의 하루는 필사적으로라도 ‘이 시간’ 곧 묵상하는 시간을 우선으로 하여 모든 시계는 돌아간다. 아이들에게도 잠깐 그 사실을 알린 까닭은, 규칙적인 삶이란 어떤 구심점이 필요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주를 의뢰하는 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고로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는 할 수 있다. 나는 민수기의 숫자세기를 통해 오늘은 정리정돈을 연상하였고, 우리 삶의 규칙적인 생활이란 주님의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던 일’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심’에 있어 그 생의 질서로 삼은 것이니. 오늘 시편을 그리 읽고 받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왜 그런가 했더니 앞서 저는 먼저 구할 것을 구할 이에게 아뢰는 중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2).

 

곧 이러한 담대함, 주께는 그리 구하고 요청해도 된다는 확신으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4).

 

우리 또한 다를 게 없는 연약함으로 주 앞에 서는 일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중보자 되시는 구주가 계셨으니, 저는 훗날에 우리의 대언자시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니까 뭘 해도 꿀릴 게 없다. 당당해도 된다. 까짓 거, 주가 다 아신다. 아무리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

(7).

 

우리 삶이 개떡 같다 해도,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8).

 

주께 이를 아뢰면 그만이다. 그리하면,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