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 3:45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1, 5
날이 차고 바람은 가벼워 멀리서도 쉬 얼굴에 와 닿았다.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길을 걷는데도 찬 기운이 볼을 타고 지나쳤다. 이제는 누구 소식에 또는 어떤 이를 생각하는 데 있어, 스쳐간 바람처럼 더는 붙들 수 없는 것을 두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저의 전화번화를 언제 지웠던가보다. 가끔씩 비워내듯 몇 년째 오도가도 않은 연락처를 그리하긴 하는데, 누구세요?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서운해 하며 특유의 토라진 말투에서 대번 저를 기억하고 놀랐다. 가끔은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더는 아이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괴리감이 찬 기운처럼 오싹하다. 친정아빠가 죽고 엄마와 함께 양평 어디에서 산다고 했다. 작은 아들이 벌써 군대에 가고 이혼도 아니고 별거도 아닌 상태로 저들 부부는 따로 산지 꽤 됐다고 하였다. 누구, 누구 안부를 묻거나 저들 소식을 전하는데 너무 아득하여 모두가 생의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던가, 아련하기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부분은 이처럼 스쳐, 바람의 길을 알 수 없듯이 언제 어디서 문득 옷깃을 타고 스며들지 모른다. 저를 통해 새삼 불리는 이름들이 아득하였다. 선생님은 여전하시죠? 하는 저의 물음에 나는 여전하신가? 하고 되묻게 하였다. 누가 누구를 대신하고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게 되는 경우도 이처럼 흔하다. 공교롭게도 기억은 손에 닿을 듯 가까운데 실제의 마음은 그때의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였다. 그야말로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길을 걷다 한참을 그리워하였다. 어쩌다 어디에 두고 온 이름들이 너무 많았다. 문득 드는 예수님의 기도 한 대목이 생각난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함께 영원하기를 바라는 ‘그들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가끔씩 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들을 지운다. 더는 서로 연락도 않는 사람들인데, 단순히 너무 많고 복잡해서가 아니다. 잊어야 할 것은 잊힐 자유가 있다고 여겨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다 문득 어제처럼 난데없는 누구 전화에 당황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저는 서운 했을까? 서로에게 있어 서운함마저 애틋할 수 있는 감정이란 생각을 하였다. 더는 기억도 없고 별로 관심도, 감정도 없이 이름들만 기억에 남은 경우는 서글프니까 말이다. 한때는 선생으로 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 품의 한 자락을 차지하던 사람인데, 더는 아무런 사이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이로,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는 이름은 후, 하고 숨을 몰아쉬는 것보다 가볍다. 그래봐야 아파트 단지 한 바퀴였지만 나는 천천히 걷다 바람이 너무 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천천히 걷다 새삼스러운 이름들로 아득하니 스쳐간 바람의 길을 건너다보곤 하였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뜻은 ‘하나님이 돕는 자’이다.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2).” 장자 나답과 아비후는 성막에서 다른 불을 드리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 엘르아살이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슬퍼할 수 없었고 누구도 저들을 애도하느라 머리를 풀고 재를 뿌릴 수 없었다. 호르산에 올라 엘르아살이 저들을 대신하여 직분을 받았다(민 20:22-29).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28).” 엘르아살은 모든 제사와 성막 봉사를 관장하는 자가 되었다. 후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함께였다. 본래는 나답과 아비후의 영광이었을까?
삶이 곧 직분은 아닐까? 누구의 뜻밖의 전화에서 저 또한 무슨 사연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새삼 들먹거리는 이름들과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말에도 그저 풋, 웃음으로 넘겼다. 또 언제쯤 어느 지점에서 다시 통화라도 할지. 나는 집에 돌아와 저의 전화번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저장하였다. 교회는 다니니? 믿음생활은 하고 있고? 하는 나의 물음이 너스레를 떨며 그래도 일 년에 몇 차례 연명은 하고 있다는 말에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그렇게 또 누구는 가고 누구는 온다. 새로 온 바람은 스쳐간 바람을 찾지 않았다. 스쳐간 바람으로 얼굴이 차가운지 새로 온 바람으로 얼굴이 차가운지, 나는 언 볼에 손바닥을 대고 서서 누구들을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민 3:45).” 대신하여 취함을 받고 직분을 맡는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막중한 책무를 느낀다. ‘내 것이라.’ 하시는 말씀에서 새삼 안도하는 이 마음은 무얼까? 이 느낌을 가만히 오늘 시편으로 이어서 연관 지으면,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1, 5).
할 수 있는 자의 복이 새삼 귀하고 놀라운 것으로 다가온다. 한 사람에게 있어 숱한 이름과 인연이 스쳐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또한 인생인데, 하물며 영원을 두고 생각할 때의 그 아찔함에 대하여….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79:12-13).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두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는 결국 그 직분을 빼앗기고 그의 죽음조차 애도할 수 없는 신세로 잊힌다. 우리 곁에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존재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라.’ 이 놀라운 신분 그 직분을 두고 나는 과연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며 살고 있을까? 이를 감사하며 영원히 전하는 자로서, 심지어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도 못하는 자들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겔 9:10).” 이 무서운 관계 변화에 저들은 눈이나 끔뻑할까? 이를 두려워하는 이는 정작 복이 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
내가 저를 생각하고 문득 떠오른 기억도 한참 서로가 좋을 때, 스스로는 천국에 간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 모두 지옥에 간다면 자기 혼자 천국에 가면 뭐하겠냐고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마치 그 마음은 영원할 것처럼,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지옥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했었다.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저에게 저가 했던 말을 들려주었더니 한참 너털웃음을 짓더니, 그땐 내가 철이 없었어요. 다 필요 없어요. 하며 웃지 못 할 농담으로나 그 말을 되받았다. 고작 1, 20년 전의 일이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모를 일을 두고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하다며 맹세까지 하기를, 우리는 스쳐간 바람보다도 덧없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내가 주를 바란다는 것도 우리 의지로는 가당치가 않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저에게 나의 기억은 어떻게 남았는지, 한참을 너스레를 떨며 당장이라도 보러 올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다 전화를 끊었다. 아, 이 한없는 가벼움이여! 나는 이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서로의 두터운 관계란 한낱 종이 한 장보다도 가소로운 것이어서, 이혼 서류에 도장만 안 찍었지 서로 남남이에요. 나중에 만나면 말씀 드릴게요, 할 말이 너무 많아요. 하던 저의 뒷말이 내 입에 쓴물처럼 고였다. 아!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119:131-132).
나는 누구의 이런저런 삶을 두고 더는 이상하지가 않다. 고작 이 나이쯤 되어서도 알겠는데, 하물며 영생을 두고서야! 내가 입을 열어 주의 말씀에 헐떡거림으로 복되다. 이는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물고 놓지 않는 것과 같이 필사적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오늘의 나에게 이 시간이, 이처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나의 삶을 둘러보는 일에 있어 ‘굴복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그 언덕에서 싸우심 같을 것이다.’ 곧 우리가 주를 알면 알수록 이 진리의 참된 의미를 붙들면 붙들수록 죽어도 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한때 가족을 운운하고 사랑하는 신랑으로 모든 게 전부라 여겼던 저의 날들이 이제는 그저 한낱 너털웃음으로 ‘내가 그랬어요?’ 하고 스스로도 어이없어 하는 일이 되었으니. 그거 참… 우리 안에는 참으로 선이 없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름의 이상과 꿈? 자기신념으로나 자유의지? 고작 몇 해 더 나이 들어서 그때 그 일이 우습기만 한 것이 사람인데, 대체 무엇을 장담하며 사는 것인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어제 누가 오지 않았고, 두 번 삭제 후 세 번째 그 내용을 간략하게 통보하는 저이를 두고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래! 하는 짧막한 대답으로 대신하였다. 전날에도 그처럼 부디 단호하기를,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 맞설 수 있기를, 그러하기를 주께 바라고 또 의지하기를 당부하였는데… 어쩌겠나? 내 안에 원하는 바 선을 행할 힘은 없고 원치 않은 바 악을 행하는 데는 익숙한 것을! 그것이 어찌 저만의 고단함이겠나?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결국은 죄 때문이다.
우리의 너털웃음도 아직 이 땅에 남아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나 허탈해라도 할 것이지, 더는 그것조차 할 수 없는 때가 오나니 곧이라. 금세다. 언제 그렇게 인생은 세찬 바람처럼 지나간 것일까? 너가 올해 나이가 몇이냐? 나는 노인네처럼 물었다. 마흔이라 그랬나? 나는 순간 아찔하여 정확히 듣지도 못하고 놀랐다. 내 기억에는 아직도 아이인데. 쌤, 쌤 하며 철딱서니 없는 소릴 지껄여대며 허물없이 팔짝 뛰다 안기기도 했던 것 같은데. 까마득한 세월이었다가 손에 닿을 듯한 가까움에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 안에 어떤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아이들… 혹시나 하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카페에 들어갔더니 매일 한 장씩 잠언을 묵상하여 쓰라던 말을 흘려듣지 않았는지, 네 명 다 어제의 한 구절 말씀이 올라 있었다! 바람은 언제나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이 스치지만, 새로운 아이들은 앞에서 다가온다. 어디 오겠나? 했던 아이들이 왔고, 설마 쓰겠나? 했던 아이들의 묵상글이 올라 있었다. 주님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우리들의 산 자의 아버지, 영원하신 만유의 주의 영광이 이런 것일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그렇지! 그리하여 저는 곧 죽을 날이 지근거리인데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러니 오늘의 이 시간을 평형으로 놓아서는 안 되는 게 저만치 뒤에 두고 온 줄 알았던 것이 여전히 지척에 있어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구나! 우리의 영원함이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시간일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곧 죽을 날을 받아둔 노인 바울의 이 허세는 무얼까? 영원이란 시간에서 오늘이나 어제, 그 지나온 시간이나 남은 시간의 하찮음에 대하여… 까마득하게 먼 기억 속의 누구이려니 했던 이와의 통화와 새로 시작하는 아이들의 퉁명스러운 묵상글이 오버랩 되는 것은 무얼까? ‘주가 도우시는 자’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삶으로의 ‘엘르아살’이 오늘 우리들이었다. 그리하여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입 안 가득 머금고, 그 의미를 음미한다. 이에 드려지는 자연스런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1).
다윗이 굴에 숨어, 바울이 감옥에 갇혀 노인의 몸으로 고백하고 또 다짐하였던 것과 같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5).
아, 이 놀라운 고백이 오늘의 ‘엘르아살’의 직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삶이 아무리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하였던 푸쉬킨이 말처럼,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2).
내가 주 앞에 아뢰고 고할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5-6).
그리하시면,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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