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전봉석 2022. 2. 17. 05:22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33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7

 

 

코로나19 전염병이 이제는 곳곳 지근거리에서 누가 양성판정을 받고 확진이 되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옮을지 여러모로 위협적이다. 코로나 변이 오미크론으로 그 위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고통을 당하고 힘든 시간을 지나야 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당장 오는 27일에 시험을 앞두고 있는 아들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이고,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는 딸애 때문에 마음을 졸인다. 집으로 아이들이 오고, 교회로 아이들이 와서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상황에서 이를 모두 중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안의 염려는 마치 광야에서 그때마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던 이스라엘을 연상시킨다.

 

사는 게 압박인가, 누구의 긴 카톡이 저녁에 들어와 있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늘 들을 때면 안타까움으로 연민까지 생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으로 견디며 살 수 있을까? 먼저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설교를 마디글로 다시 읽어본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9-21).

 

‘그러함에도’ 우리는 우리가 입을 열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을 더한다. “서로 화답하며” 하여 우리 안에 두시는 주의 마음으로 찬송한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이는 범사의 일이다. ‘어떠하든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것이 살 길이다. 시쳇말로 내 코가 석 자인 판국에도 서로를 위해 주 예수 이름으로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공경하며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겨서 피차 복종하는 일이었다.

 

어제는 놀라운 사실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두 아이의 가정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그러니 2년여 만에 교회를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혀 할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이 시편 1편을 또박또박 암송하였다는 것. 저들을 어찌 교회로 보내시는가, 하고 궁금해 하던 것이 풀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목하여 그의 인자하심을 목격하고 체험하여 그의 기이하심을 알리는 것이었다. 오늘 시편은 이 주제로 압축된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7).

 

내가 누구를 위로 하고 또는 어떤 일을 두고 누구와 시간을 같이할 때, 먼저는 나의 ‘감사의 소리’를 들려준다. 다음은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해준다. 나도 나의 지나온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늘 앞서 걸으시며 나를 인도하셨다. 곧 모세의 증언과 같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33).

 

실제 나의 날들이 그러하였음을, 종종 아이들에게 들려주거나 누구에게 말하여 주는 나의 이 걸음걸음이 때론 내가 말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기이하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이와 같은 말씀이 나의 생활의 기록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삶에 나타나 나를 양육하시고,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하신다. 이에 내 안에 두시는 “복스러운 소망” 곧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귀히 여기게 하시더니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하신다. 이를 위해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시었다.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셨다.

 

종종 누구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나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온통 거역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그러고 있는 누구를 권유하고 돌이켜 주의 사랑을 알리고 그 놀라운 은총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오늘 본문 모세의 회고가 그런 내용이다. 이를 마디글로 옮겨 다시 묵상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내 이야기가 된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30-31).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길이 아닌 데서도 길이 열렸다. 막막하여 좌절과 역경만이 난무한 때에도 주님은 언제나 나보다 앞에 계셨고, 나를 위해 싸우셨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고 계심을 알겠다. 그러니 나의 날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평온한가? 감사와 찬송만으로 가득한가? 늘 되풀이 되는 불신앙의 불안과 두려움은 나를 엄습한다. 겉으로는 물 위의 백조 같이 평안해보이나 물밑으로는 아무도 모르게 발버둥치는 꼴이라, 스스로도 종종 민망할 따름이다. 요 며칠은 이런저런 급작스러운 일로 파동을 일으킨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 약을 더 먹었다. 먹었는데도 가슴은 답답하고 숨은 고르지 않아 이 일을 어쩌나, 하는 불안 위에 불안은 가중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들은 오고, 두 아이가 정확히 성경을 암송하고 한 아이는 금요일까지 시간을 달라며 의지를 보였다. 지난 주일부터 엄마아빠와 같이 2년 만에 교회에 갔다며 좋았다는 아이의 말이 감사하였고 듣기 좋았다.

 

그리니 오늘의 이 이율배반적인 나의 모습으로 나는 주 앞에 호소한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먼저 나오려 하는 내 안의 원망과 두려움의 소리를 삼킨다. 주는 성전에 계신다. 나는 주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주는 내 안에 계신다. 이와 같은 삼단논법이 성립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섣불리 걱정과 우려를 토로할 게 아니다. 염려는 쉼이 없고 걱정과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을 시달리게 한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그 파동은 나에게 병적으로 요동친다. 그러한 때에 나를 붙드는 것은 주를 향한 마음으로였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였다. 모세의 표현처럼 그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나를 품에 안고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계신다. 이에 그 어떤 환난이 와도…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96:1-6).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은 나를 죄의 올무에서 벗기셨다. 심한 전염병으로부터도 건지신다. 그가 나를 그의 깃털로 감싸 덮으신다. 나는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한다. 이와 같은 찬송과 고백이 이제는 내 것이라니! 이는 나의 남다른 신앙과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의 진실함”으로이다. 누구보다 나는 연약하고 모자라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으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이다.’ 저는 나의 “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신다.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저는 막으심으로,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신다. 나는 그 앞에 ‘아멘’ 한다.

 

실은 어제 오후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과로 갔다. 저들의 말은 늘 나를 절망케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마나 한 소리'들 듣고 나오면서 나는 그 절망의 소리가 새 힘을 얻게 하는 것을 느낀다. 마음을 편히 먹으라는 둥, 숨호흡을 이렇게 따라 해보라는 둥, 결국 담당의는 무슨 유듀브 채널 하나를 소개하고 호흡과 명상 따위을 권하였다. 결론은 저들도 별 수 없다는 소리다. 자신들도 그게 한계라, 어쩔 도리가 없다는 소린데, 저가 내게 들려줄 수 있는 말의 한계에서 나는 되레 안도한다. 결국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위로가 된다니! 우리의 한계가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이 적힌 카톡을 새벽에나 읽고, 우리의 무력함과 그에 따른 의지할 수 있는 길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신하면서 드는 안도감. 나도 나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를 안다고 해서 내가 누구보다 나은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위로였다. 곧 우리가 합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18-19).” 오늘 우리에게,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우리는, 나는 주를 바란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답을 보냈다. 지금의 어려움이 축복인 것을.

 

나에게 병적인 불안이 없었더라면 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묵상하는 시간을 귀히 여길 수 있었을까? 나는 아이들에게도 숨기지 않고 말하였다.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어서, 나는 묵상을 한다! 나를 이길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서 나는 묵상글을 쓴다. 젊음이란, 아직 어리다는 것은 이 모든 어려움이 막연하여서 당장에는 다가오지 않는 일이것으나 이를 ‘농담으로나’ 듣는 이가 있고, 이를 일찍히 주의 영으로 듣고 주의 마음으로 새겨 주의 크신 역사에 쓰임 받기도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시늉, 저 건성으로라도 쓰는 아이들의 묵상글을 사랑한다. 그 시간을 귀히 여긴다. 성경을 찾고, 읽고, 생각하는 동안 성령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한 줄씩 한 줄씩, 그 내용을 조금씩 더 늘려가자고 권면하지만 성령의 내주하심이 아니면 그것까지야! 그러나 언젠가 절박하고 절실한 상황에 맞다뜨렸을 때 나는 저 아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곧,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 147:3).

 

이 하나님을 저들도 직접 느끼고, 체험하고, 놀라워하다, 그 기인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하여 줄 것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이 귀한 경험, 그 숱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모세는 알고 있었다. 저의 하나님은 아버지셨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비로소 모세에게는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안은 아버지’로 다가왔다. 그 아버지는 항상 우리의 길 앞에 계셨다.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을 저는 확신하고 하는 말이다(30).

 

오늘 내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언제나 당면한 현실을 초월한다. 앞서 걸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이다. 어떤 어려움을 능가하는,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나는 주의 보호하심을 누린다. 이를 누구에게 말하여주면 저는 농담으로나 들을 소리라는 것도 이해는 한다. 마치 내가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자랑한다. 누구의 긴 카톡에 그리 답을 한다. 누가 물으면,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하고 이를 알려준다. 왜? 저는 이제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그의 품에 안고 이 광야를 함께 걸으신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3-4).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된 것처럼 저 아이들에게도, 누구의 힘들고 지친 현실에서도 반드시 찬송이 되고 자랑이 될 것을 믿는다. 고로 나는 오늘도 나의 연약함을 바울처럼 자랑하고 사랑한다. 나의 연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이다. 고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