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8
161-176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삼상 18:14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신앙적으로 ‘좋은 사이’는 참 귀하다. 친구로든 부부로든 성도로든 함께 뜻을 같이 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권면할 수 있는 사이는 복이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가 그 예이다(1-4). 함께하여 주의 집 안에서 다닐 수 있는,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3-14).
돌아보면 그때마다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을 두셨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에까지 이런저런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이다. 저들이 이제 하나님의 뜰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우이면 더욱이나 말이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후 8:23).”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이 된다는 것, 젊을 때는 거기까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함께 그 생활 속에서 주를 찬송하고 염려와 근심을 기도로 격려하며 위로할 수 있는 사이란 그리 흔하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로 친구라 호칭하시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는 만유의 주, 전능자, 창조자, 나의 구주가 나로 친구 삼으신 놀라운 일이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서로 그럴 수 있는 신분도 관계도 아닌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놀라운 사이가 ‘너와 나’로 서로가 어떤 처지이든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디 있든지 그 마음이 기도로 응원할 수 있는 것은 복되다.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신 29:29).” 여기서 소외된 ‘사울’의 경우가 상대적으로 불행하게 그려진다. 저의 마음에도 주를 사랑하고 겸손히 주의 뜻을 따르는 영이 더했다면 사울과 다윗도 둘도 없는 좋은 사이가 되었을 텐데… 그의 속에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들어갔다는 데서, 생각은 늘 괴롭기만 하다. 뭘 해도 해코지 할 마음뿐이라, 심지어 자기 딸과 결혼을 시키려는 데 있어서도 내심 악의적이다.
나의 안에 이와 같은 악의가 가득하였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그러니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의 사랑 앞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사울이 곧 나였다는 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나님을 싫어할 때는 참 겁 없이 내 멋대로 하고 살았다. 그런데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죄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를 돕는 사람들을 곁에 두셨고, 저들의 은혜를 입게 하였다. 순간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고3 때 가출하고 며칠을 떠돌 때이다. 선생이나 친구를 만나면 저들이 재워주고 얼마씩 준 것은 그렇다 쳐도 부산진역에 당도하여 역전을 나올 때 귀퉁이 바닥에서 김밥을 팔던 노모가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없는 돈을 탈탈 털어 두어 줄 꼬마김밥을 먹고 아쉬움을 달래고 일어서려는데, 저이는 검은봉다리에 먹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담아 측은한 눈빛으로 건넸다. 먹는 동안 노모는 내게 인복이 많다느니, 타고난 상이 좋다느니 하면서 어찌 알았는지, 일찍 집에 가라! 하고 말을 건넨 뒤였다. 또 어디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을 때도 슬그머니 곁에 다가온 이가 빈병을 줍던 노인이라. 저이 또한 어디서 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하고 묻더니 제집으로 데려가 씻기고 끼니를 챙겨주고 한나절 누워 자게도 하였다.
모든 게 꿈만 같은 일이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은 신분이나 나이나 어떤 이해관계로가 아니다. 그때마다 주가 건네시는 친구고, 이웃이다. 곧 주님이시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내왔던 것 같다. 정을 주면 또 쏟아 붓는 기질이라, 때론 아이들 부모가 시샘을 할 정도였으니… 것도 돌아보면 나의 복이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하고 후대에 일러,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27:10).” 이는 주가 그때마다 함께 하심이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보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5).” 상대적으로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8).” 함께 기뻐할 수 없는 질투는 자격지심의 결과다. 불쌍한 일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욥 8:13-15).”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 옳다.
사는 동안에 주의 돌보심을 받는다는 것은 곁에 두시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표가 난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곧 우리의 복이란 스스로 어찌 노력하여 얻은 관계와 관계로가 아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에 대해 묵상하게 한다. 말씀을 통한 훈육과 교훈(169-170). 찬양으로의 결의(171-172).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173-176). 이로써 하나님을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한다는 시인의 마음이 와 닿는다(164). 특히 그 말씀을 탈취물을 얻는 것 같이 즐거워한다는 표현은 위트다(162). 주의 말씀이 그만큼 즐겁고 복되다는 소리로, 내 곁에 두시는 이로도 그 사실은 알게 하신다. 언제 그 부산진역에서 만난 노파의 말처럼 내게 인복이 많다. 이는 참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때에 얻을 수 있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다.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시 119:161).
나는 사울의 정신분열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하고 싶지 않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저를 조종하는 것으로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괴로움이었겠다. 그러니 우리말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그래서가 아닐까? 사탄이 역사는 데는 별 수가 없는 일이어서, 우리로 주를 경외하라 하심은 이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그러니 이는 모든 일의 결국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말씀 앞에 나를 붙어 세울 수 있는 것, 이 또한 주가 주시는 영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서는 일이 복된 것은 그래서이다. 서로 말은 안 해도 어디 있든지, 꽤 오랜 시간 연락도 못하고 지내면서도 주가 저와 함께 하실 것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마음, 말씀이 더하시는 참 기쁨과 신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2).
여기서 탈취물은 전쟁에서 승리로 얻은 전리품을 의미한다. 승리하면 모든 것을 가진다. 있는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살면서 왜들 강퍅하게 되는가 하면 주의 말씀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셈이다. 어릴 적, 내가 철없이 멋대로 굴 때 나의 아버지는 설교원고를 쓰게 했다. 그때는 영상이니 인쇄물이 귀해서 저마다 설교를 받아 적고, 소모임으로 이를 나누며 정리하였고 주일학교나 구역예배 교재로도 활용하게 하였다. 덕분에 나는 철자법이 엉망이어도, 글씨가 삐뚤빼뚤 형편없어도 한 번도 그것으로 뭐라 나무라신 적이 없다. 받아 적고 다시 읽는 일로도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아신 것이다. 학교 공부는 뭐라 한 적이 없으면서 설교원고는 종종 검사를 받은 것 기억이 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감리교 목사 리버런드 맥클레인은 두 아들 노만과 폴에게 성경을 읽고 작문을 쓰게 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귀한 줄 알 때 전부도 아깝지 않다. 가령 나의 하루 중 이 시간, 새벽 일찍 창가에 앉아 말씀을 읽고 쓰고 하는 일이 가장 즐겁고 귀하다. 이를 위해 다른 시간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어제는 장모님이 간병병실로 옮겨지고 예상과 달리 가족들 출입이 금지되는 바람에 아내가 집으로 왔다. 피곤할 법도 한데, 저녁에 영화를 같이 보자며 박소담 송새벽 주연의 <특송>인가 하는 것을 틀었는데 우당탕탕 하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나는 보다 초반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이른 새벽,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3-164).
여러 번 되뇌며 말씀의 의미를 되뇌며 새긴다. 여기서 일곱 번이란 정해진 시간에 의무적인 행위로가 아니라, 성경의 숫자 7은 완전수다. 계속적인 일상의 전부로써 주의 말씀을 찬양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누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말씀을 떠올리며 어느 구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 이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상한 게 아니었다. 가까이 지내는 몇몇과의 대화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누구든지 저의 관심이 결론이다. 기승전, 돈 이야기로 풀리는 사람이 있어, 대화하다 보면 언제 돈 되는 일로 온통 마음이 간다. 가까운 누구와는 기승전, 낚시다. 같은 취미와 관심이어서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작하다 결국은 낚시 이야기다. 그렇듯 하루에 일곱 번씩 우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찬송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으로가 아니라 몸에 밴 삶으로다. 그럴 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5).
흔히 끼리끼리 모인다고 이는 별 수 없는 화학적인 반응과도 같다. 장애물이란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리 두는 이가 사탄이다. 우리가 부득이 안 믿는 자들과 상관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나 저를 가까이 하여 끼리끼리 안에 들 때,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 23:33).” 저마다 자신의 믿음을 붙들고 ‘난 안 그래!’ 하고 확신하지만 어느새,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106:36).
어쩌다 그리 되는 게 아니다. 끼리끼리 문화란 본래 서로가 맞는 게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래도 난 안 그래,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 3:15-17).”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말씀일 테고, 진주라 하면 내가 살면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이것을 지혜에서 얻는다. 그 증거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6).
곧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야고보의 일갈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살면서 사느라 주를 멀리하면서 믿노라, 하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겠다. 목사가 되고 은연중에 누구랑 대화하면서 교회는, 신앙은 어떠한지 묻게 되는데 저마다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는 안 가고, 예배와 말씀은 취미 정도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믿는다는 말에 나는 그저 난감할 뿐이다. 나도 그러고 살아봤는데, 그게 다 미신적인 거라. 안 믿는다고 하기는 찝찝하고 믿는다고 하기에는 당장 포기해야 하는 게 싫고…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그러니 별 수 없다.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말씀으로 산다.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67-169).
말씀을 근거로 살아간다는 일은 의외로 가장 쉽다. 내가 할 게 없다. 나는 믿음으로 사는 게 제일 쉽다. 아니면 모든 염려나 근심, 끝도 없는 걱정에 시달리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의 노예로 살면서도 행복인지 불행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말씀으로 사는 덴 담력을 주신다. 같은 염려, 같은 두려움인데도 전에 대처하던 것과는 다르다. 오늘 시편을 보면 유별나게 간구, 기도, 깨닫게 하소서, 건지소서, 도움이 되게 하소서, 돕게 하소서, 찾으소서 하는 간구의 표현들이 자주 사용된다. 오늘 시편은 장문의 긴 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의뢰하고 의지할 것은 말씀뿐인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저의 긍휼하심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함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곧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18:23-24).
이와 같은 확신이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170-171).
곧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33:1).
시(詩)가 시로 노래한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2-173).
나의 하루가 뭐 그리 대단히 경건을 도모하지 않는데, 이는 의식하여 의도적으로 취하고 수고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생이 어떠한가를 알면,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9).” 굳이 바랄 게 없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어서,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112:7).
다른 데 마음 두고 씨름하고 고투를 벌인들, 곁을 보면 믿는 자들이 가장 복되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그러니 누구는 사느라 죽어라 하고 살아도 사는 게 지옥인데, 누구는 지옥 같은 삶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산다. 그 차이는,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4-175).
참된 가치는 부여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러하였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그처럼 어려웠을 따름이다. 이제 곧 그 날이 올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때 우리는 알 것이다. 누구는 놀라 두려워 떨며 어둠에서 이를 갉고, 누구는 영광된 자리에서 주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어떻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또한 이미 정해진 바라. 가장 불쌍한 영혼은 이를 알지 못하고 허비하다 아까운 생을 마치면서 십자가 위에서 주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7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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