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전봉석 2022. 5. 29. 05:17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삼상 19:18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시기하는 마음은 이미 살인하는 것과 같다. 남을 샘하고 저의 잘되는 것을 미워하면서 스스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굳은 결심으로 맹세도 하지만 모든 게 허사다. 대표적으로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하나님의 경고에도 이내 살해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가운데,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선을 행하면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선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일이었다. 시기하는 마음으로 요셉의 형들은 살인과 다를 바 없이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았다. 그때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37:4).”

 

앞서 그 마음에 드는 시기심은 경고등 같다. 이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한 번 들어선 마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상대적으로 요나단을 생각하면 저의 마음에는 어찌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런데 시기심을 버리면 참된 우정과 사랑이 가득하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저는 자처하여 다윗을 보호하고 변호하였다.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2).” 결국 사랑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헛된 영광’ 곧 세상의 사랑하는 것으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할 때, 우리 안에 드는 나름의 선한 마음과 의로운 생각도 실상은 ‘진리와 함께’ 하지 못할 때 거짓되다. 우리의 중요도는 관계가 아니라 공의다. 어느 심리학자가 나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관계주의’로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와는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하였다. 긍정적으로는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인 행동으로 만족함을 누리지만 상대적으로 남에게 맞추려고 하다 보니 정작 그 안에 내재되는 감정은 만족함보다 불편함이나 억울함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도 바라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거에 흔드는데 서로의 관계보다 공의가 중요한 것을 요나단의 구술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2).” 저는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그 부친의 옳지 못함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공의가 사라지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마비가 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어떻게 말인가?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곧 우리의 공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 15:1-2).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60:4).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공의를 떠나지 않게 한다. 악과 선이 혼재되고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지 오래인 세상에서 우리의 분별 기준은 오직 하나,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5:7).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그 어떤 선행도 의로움도 자칫 자기 공명심에 사로잡힐 위험성이 크고, 그와 같은 의가 실은 자기만족으로 인하고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악보다 더 악하게, 죄보다 다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게도 한다. 신념이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완고함이 믿음을 대신하며, 자기 의가 하나님의 선을 능가할 때 저는 사탄보다 더 악하다. 사탄은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알지, 그래서 예배가 예배를 배척하고 종교심이 신앙심을 주장하려 할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상으로, 예배를 진리 아닌 자리로 이끈다. 이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선을 추구하고 의를 구하며 자신을 세워 사람을 이롭게 하려 하였다. 사도 요한의 놀라운 언어적 문장구조는 의도적인 대칭을 이뤄, 앞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는 논거를 던졌다.

 

잠든 사이 한 아이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캄보디아에 나가 있어 스승의 날을 넘기고 이제야 안부를 알린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일찍부터 아이의 마음속에 두신 주의 사랑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알기로 저는 지금 어디 엔지오단체로 활동하고 있고, 그 선한 영향력에 주의 권능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그와 같이 특수한 사랑(?)이 누구로 세계 각지 오지로 나아가 주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헌신하게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십자가로 무너뜨리신 우리 주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 지금도 이를 위해 보좌에 앉으사 우릴 위해 간구하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나는 저 아이의 마음에 두신 그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주의 사랑과 권능이 저와 함께 하실 것을. 하여 그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 것임을.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주께서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나도 저를 생각하다 기도한다. 한참 나이 때, 자기 좋을 대로 세상을 살아도 그러려니 하고 용서가 될 스무 살과 서른 살 사이에서 그와 같은 환경을 자처하며 그와 같은 시간으로 그와 같이 주의 영광에 동참하는 아이의 열망은 주의 것임을 안다. 이를 주의 사랑으로 응원한다. 처음 어디 엔지오에 참여하면서 그때마다 나는 그곳이 기독교단체인지,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해도 주의 사랑을 가지고 일하는 곳인지를 자주 묻곤 했었다. 더러는 우리의 선행이 우리로 하나님을 멀리하게도 한다는 사실을. 이는 여느 악함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누구는 나의 이런 생각에 안 하는 것보다 낫지! 하고, 그게 왜 나빠? 하고 반문하기도 하였는데… 그게 더 나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이 그 어떤 악보다 악할 수 있다. 우리로 완고하게 하는 것은 실상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우리의 궁극은 주의 사랑이다. 진리다. 그 사랑이 없으면… 선행도 가치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에 합당하였다. 하나님, 나의 주 그 자체가 사랑이시다. 내가 무엇을 행하고 안 하고, 더디고 멀리하는 것도, 바울은 사랑의 정의하기에 앞서 우리의 종교심과 열심을 먼저 망라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오늘도 나는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두고 묵상을 집중한다. 사울의 정신분열증적인 행동과 그 마음의 어지러움에 대ㅎ서는 가급적이면 뒤로 미룬다. 실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 사울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서, 저의 극단적인 행동보다 두렵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이번 정부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 역사상 군사정권보다 더 무서운 검찰정권을 경계한다. 당시 군인들은 단순하였고 무식하였다. 무모하였고 무참하였다. 한데 오늘의 권세는 정교하고 은밀하다. 감추어진 명분은 국민들의 마음을 조작할 수 있다. 심지어 개조할 수도 있다. 어느 정권이나 세상에는 완전하지 못했다. 저들의 헌신과 사랑은 허울뿐이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성경의 조명은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동일하였다. 지금은 시국이 어느 땐데… 하고 누가 말하겠지만 그래서 더 두렵다. 선과 악이 혼재됐다. 오늘은 이익이 선이다.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보장하면 선이다. 우리나라는 ‘부동산’이 정권을 교체하는 기이한 나라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가진 게 많고 든 게 적지 않을 때 참 공의를 바라기는 쉽지 않다. 자칫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는데? 명분과 신념은 이익을 보장하고, 수익을 창출할 때 가차 없이 잔인하다. 우리의 선행도 저마다의 이미지일 뿐이다. 자기만족을 포함해서, ‘자기 몸을 불 사르게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이라 해도 헛되다. 안 하는 것보다 낫지! 하고 항변할 수 있으나 안하느니만 못한 게 하나님의 공의를 배제하는 선이다. 산불이 났을 때 이를 회복시키려 들쑤시고 산을 재정비하는 것보다 가만히 두는 것이 자연복원능력이 월등히 훌륭하다는 연구를 보았다. 사람의 수고보다 자연의 재생정화운동이 훨씬 빠르다. 하나님이 두신 선은 때로 그 자체로 선하다. 이를 어찌 가미할 때 예배가 변질되고 하나님조차 우상이 된다. 

 

결국 세상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그런 것이고, 우리는 주를 의식하고 바랄 때 참된 길로 인도하심을 얻는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그리스도인보다 세상으로부터 괄시와 박해를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정상적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스스로 애쓰는 일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정작 분노의 날에 우리는 숨기심을 얻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숨을 수는 없다. “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오늘 시편은 성전으로 향해 가는 첫 걸음으로, 회개로 그 발을 내딛는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20:1).

 

앞으로 134편까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가 이어진다. 한데 그 첫 발이 회개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영적인 능력을 얻는다. 자신을 돌아보아 주의 용서와 긍휼하심을 바라는 힘이다. 그때가 환난의 때일 수 있다. 그럴 상황이 아닌 중에 주를 바라는 게 신앙이다. 나름의 논리와 타당한 주장이 우선이 아니다. 환난은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이는 청신호와 같아서 주를 찾으면서 소망의 응답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왜 우리를 환난 가운데 두시는지,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곧 이를 살면서 삶으로 아는 사람은 강하다. 그건 환난이 적신호가 아니라 청신호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르짖을 때이다. 기도할 때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우리가 흔히 그럴 때가 아니라고 여길 때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니콜라스 오스트롭스키의 장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와 같이 인류가 겪어온 역사를 봐도, 또는 소설에 나오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파벨 코르자긴의 생애를 봐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시편에서 찾아 구하면,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18:6).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118:5).

 

이와 같은 신앙 체험이 하나쯤은 우리 인생의 표지가 돼야 한다. 지팡이가 되어주어야 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2-4).

 

오늘 시인은 환난 중에 스스로도 속이려 하는 혀를 책망한다.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실상이 된다. 거짓으로 꾸민 말인데 해놓고 보니 진짜 같다. 파괴력은 엄청나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3).” 또한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3).”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말의 가지치기다. 거짓이 거짓을 낳는 기하급수적인 확장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5).

 

거짓의 특징이 어둠을 선호하는 것이다. 빛을 가린다. 은밀한 중에 일한다. 하여,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6).

 

돌아보면 나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데서 절망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후 6:14, 잠 13:20).” 우리는 이제 잘 안다. 선과 악을 아무리 섞어도 서로가 섞일 수 없고, 거기서 오는 것은 의인의 고통일 따름이며, 그와 같은 환난이 도리어 우리로 주께 회개하고 성전을 향하여 나아게 한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7).

 

억지로 어찌할 수는 없다. 다만 기도할 뿐이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5).” 이에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사 52:11).”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로 돌이키게 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싫어할 때 도리어 나는 기뻐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