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삼상 20:42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8
서로 마음을 털고 그 속을 살필 수 있는 사이가 성도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주를 경외함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후대에 솔로몬은 친구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주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마음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의를 기반으로 한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서로 입바른 소리는 원수라도 그럴 수 있으나 친구란 뭐라 일러 꾸짖을 수 있는 사이다. 소위 남들 앞에서는 편들고 둘이 있을 땐 나무랄 수 있는 사이다. 다윗의 표현처럼 죽음과 삶의 거리가 한 걸음 간격이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3).” 그런 삶을 사는 동안 이런 사이 하나쯤 가지고 있음이 복이다. 학창시절 어느 선생이 들려준 말 가운데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이 내가 죽은 뒤 무덤을 찾아와 슬피 울어줄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했다. 어린나이에게 그 말이 근사하였던 것은 살았을 때야 누군들 이런저런 일로라도 친분이 있지 않겠나? 사는 날을 계수함이 지혜였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그래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주의 나라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귀하였다. 내일은 정작 내 것이 아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면 예수께로 그 마음을 두고 친구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귀하다.
오늘 요나단의 고백에서 이와 같은 진실함을 보게 된다. 곧 주를 모시고 살 때 성도 간의 이와 같은 마음이 서로에게 예수가 되어주는 일이겠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삼상 20:4).” 이를 두고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주님의 마음이 연상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3-14).” 주를 나의 친구로 모시고 산다는 것, 서로를 마음에 두고 살펴 말씀으로 같이 하고 기도로 위하는 사이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
그런 사람 하나 내 곁에 있다면 어떤 일에서든지 든든하지 않겠나?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무엇이든지 주께 구하고 바랄 수 있는 것,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삼상 20:11).” 서로가 주 앞에서 약조를 한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14-15).” 요나단은 장래의 일이 주의 손에 달렸음을, 그때에 자신의 후손을 후대하기를 다윗에게 간청함으로 위로한다. 현실을 보면 서로의 입장이 바뀐 것 같다. 이는 주의 언약을 앎이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서로에게는 털어놓아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주의 ‘화평이 언약’을 붙듦이었다. 주의 자비하심은 내가 어떠하든지 떠나지 않으신다. 이 화평의 언약은,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6-27).” 이토록 성경이 보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의가되심으로 확증하셨다. 이에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로 멸망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주가 우리에게 두시는 너와 나의 사이였다.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는 요나단의 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가 운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41-42).” 슬픈 장면 같으나 복되고 귀한 모습이다. 훗날에 다윗이 지었을까?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119:63).
곧 오늘 우리 성도 간의 마음이다. 서로 찾아 만나고 마음의 일을 두고 심금을 털어놓을 때, 그와 같은 왕래와 대화 하나하나가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어려운 일 앞에 어려운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러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야,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1).
오늘 시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두 번째로 노래로, 우리가 도움을 바랄 때 당장 눈에 들어오는 ‘산’ 같은 존재를 찾기 마련이데, 성경은 일거에 이를 헛된 일이라 규정하신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오늘 시편도 신뢰의 소리,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어려움으로 우린 시험에 든다. 하여 주가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하며 아뢰는데, 이를 받아 바울은 설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표현을,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1-32).” 예수를 그 증인으로 세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까지 사랑하신 사랑이신데, 그런 분이 하물며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나?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4:4).
우리에게 위기는 우리로 참 도움을 알게 한다. 누구를 욕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생에 어려움을 겪어보니 가까이하고 함께 하였던 이들이 가장 멀게 느껴졌다. 돈 앞에 장사 없고, 가난은 친구도 떠나게 한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인생 돌아보면, 원래 그런 법이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18:23).” 속된 말로 돈이면 없던 교양과 우아함도 저절로 생겨난다. 돈 앞에 장사 없고 모두는 저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 세상사 그러하나,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이스라엘’에 내 이름을 넣고 여러 번 다시 읽으면 그 뜻이 더 분명하게 와 닿는 듯하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그리하여,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28:7).
저의 생이 늘 광야를 떠돌며 도망 다니는 신세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가능하였을까?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세상 그 무엇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정죄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예수님도 이르시되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종종 어려운 일이 터지면 고질적인 우리의 속성은 누구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고 원망하려 든다. 그러다 자책하기도 하고 그 일로 모진 생각을 먹기도 한다. 이는 다 오늘 구절을 바로 알지 못함이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3).
아, 이 놀라운 사랑하심과 자비하심 앞에 무엇이 두려울까? 내가 나도 뭐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 말씀이 내 것으로 나를 붙드신다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2-3).”
한동안 죽고 싶은 마음으로 시달리듯 충동을 느끼며 살았던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같이 생활하며 어려운 살림을 의탁하고 교회 옥상에서 같이 살던 가족이 있었다. 그때 동갑내기 위로 있던 형이 관악산에서 실족사로 죽었다. 교회는 슬픔에 잠겼고 나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는 서울대를 다니는 수재였다. 한참 후에 저가 실은 실족사가 아닌 자살이었다는 것을 그 부모와 우리 부모가 눈물로 나누던 이야기 가운데서 듣게 되었다. 그 일 후였을까? 어린 나는 그 일이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비법 같았다. 아, 그런 수도 있었구나! 하는 어떤 비상금 같은, 든든한, 언제든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당시의 시달림에 대해서는 떠올리기도 지겨울 정도로 일반적인 상상 그 이상이었다. 요즘 가끔 노희경 극본의 <우리들의 블루스>를 재방송으로 띄엄띄엄 보는데, 어제 오후 다운중후군 쌍둥이 언니를 다시 보육원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꼼꼼하게 본 게 아니라 줄거리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시선 그때마다 느끼고 짊어져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너무 일찍 알았고, 그때 어느 형의 그와 같은 소동은 나의 평생에 두고두고 따라 붙는 악령 같다.
한두 해 전, 그처럼 자해를 하며 자살기도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던 아이와 서너 달 같이 글을 쓴 일이 있다. 그때는 어떤 이유로 두 시간씩 매일오던 아이였으니까 한 달쯤, 서로 시간이 더하고 편한 사이가 되면서 물었다. 안 아프니? 그리고 다시 깨어나면 기분이 어떠니? 하는 나의 질문은 지극히 사적이었고, 목사답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아이의 어이없던 대답, 사실은 진짜 죽었을까봐 무서워요! 다시 눈을 뜨고 병원이구나, 하는 걸 알면 우선은 긴 한숨이 나오고 안도감도 들어요. 그런 아이에게 이어지던 나의 바보 같은 질문 하나 더, 근데 왜 자꾸 그래? (저의 팔뚝을 보며) 안 아파? 순간 참 바보 같단 생각도 들었는데, 순간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하는 아이 말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던 것 같고.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5-6).
나는 그때 나도 그러저러 했던 날들이 많았던 것을 숨기지 않고 다 말했던 것 같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누가 더 끔찍했나를 경쟁하듯 말하기도 하였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하나님은 다음 전개로 넘겨주지는 않으셨다. 나는 내가 알게 된 하나님, 저는 나를 지키시는 이심을 우리가 같이 알기를 원할 때,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은 저의 엄마가 그것을 거절하였다. 종교적인 것을 원하지 않았고(!) 글방이면 모르지만 교회로는 싫다면서 아이를 더는 보내지 않았다. 그 일로 한동안 내가 우울증으로 시달렸던 것 같다. 그때 아마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생겨나서 처방전이 달라졌고, 지금은 아예 고착화된 증상이 되었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의 답답증, 가슴에 큰 바위를 얹고 있는 것 같은 실제의 통증을 호소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나로 황무지에서 짐승을 안 만나게 하시는 게 아니라, 만날 때면 호위하고 보호하시는 것을 알게 하신다. 심지어 나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어느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아플 때 연거푸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알게 된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하나님의 방어하심이 실감나는 것은 이를 없이하실 때가 아니라, 그와 같이 신음할 때 눈을 들어 주를 찾게 하실 때였다. 곧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4).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27:3).
아예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고 우린 바라지만, 주님은 그런 일을 통하여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로 주를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7).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은 위협을 느끼는 강도와 비례한다. 아무런 일도 없고 평탄할 때야, 그 건물이 내진 설계가 잘 돼 있는지, 기반은 든든히 세워졌는지 누가 알겠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5).” 이를 알면서 주가 나를 보호하시고 함께 하심을 아는 거였다. 그리하여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4:8).
세상이 어떠하고 지금이 어느 땐데, 하는 소리에 크게 요동하지 않는 것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께서 다 이겨놓으신 세상에서 삶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121:8).
우리가 영원한 나라, 성전을 향해 올라갈 때에 부르는 노래 두 번째로는 신뢰였다. 어제 그 첫 노래로 ‘회개’가 그 시작을 알렸다면, 예배와 찬송은 강요될 수 없는 믿음으로다. 다음 122편의 시에서 이를 노래하고 있다. 오늘은 다만
지키시는 이가(3절), 지키시는 이는(4절), 지키시는 이시라(5절), 너를 지켜(7절a), 영혼을 지키시리로다(7절b),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우리를 지키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성전으로 올라간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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