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22. 6. 1. 05:13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피하여 공동체를 형성한다. 저를 무시하던 부모형제와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 그 수가 사백 명 가량이었다. 여기서 교회 구성원의 면면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작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은 환난으로다.

 

환난이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를 드러낸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환난이 우리로 안식을 알게 한다. 이를 하나님의 공의로 바울은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오실 때에는 영원한 심판이 행사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8).” 환난에도 견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안식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대적하던 자들에게는 형벌이 가해진다. 곧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주의 얼굴을 더는 뵐 수 없는 것, 그의 힘의 영광을 더는 바랄 수 없는 것이 영원한 멸망이다.

 

하여 바울은 자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기쁘게 받는다고 하였고,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는 그와 같은 환난에서 도리어 기뻐한다고 하였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이는 내가 알지 못할 때,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실 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즉 오늘 본문에서 두 갈래로 갈리는 내용 하나, 환난을 당하던 자들이 다윗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도엑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종들 85명이 도륙당하는 엄청난 죄악이 대비된다. 이를 다시 주님 재림의 때, 그 심판의 자리로 가져가보면 그때에는 심판장 되시는 이가 모여선 무리들을 둘로 나누는데,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즉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저의 앞에서 나뉜다(살후 1:7-8).

 

그리스도는 앞서 우리의 모든 고난을 당하셨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그럼에도 이를 거역하며 거절하고 멀리하는 자들도 있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10-11).” 곧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멸망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다시 말해서 우리의 환난이 우리로 환난 중에서 그리스도의 위로를 더하게 한다. 그렇게 저들 사백여 명 가량이 다윗이 있는 놉 땅 아둘람으로 모였다. 간혹 교회에 모인 자들의 면면이 가지가지라, 마치 이를 이상한 눈으로 여겨 스스로 교양을 떨며 고개를 흔드는 교인들은 위험하다. 엄밀하게는 환난이 없으면 교회로 나아갈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러다 조금 살만해지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떠나가는 ‘데마’도 수두룩하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났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작 저들이 자신의 문제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가 된 결합이다. 그런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리다. 다윗을 중심으로 다윗에게로 도피하여 온 자들의 면면이 곧 오늘의 우리들이다. 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그게 그렇게 어렵다. 불가능한 일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따랐고 대부분이 소외된 자들이었으나(막 1:32-34, 45, 2:2),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난 자들은 많지 않았다(마 9:8-13, 눅 19:1-10). 하여 주님은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곧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다고 하면 그 사정과 처지는 이해하겠는데, 상대적으로 나 또한 누구에게 자신도 그러하였다는 것을 잊고 돌아서는 꼴이다.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주님은 날마다 나로 인해 상처를 당하신다. 그때마다 내가 저들을 멀리하고 그래서 교회를 등지는 것 같이 우리를 등지신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멸망은 없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하여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2).” 이를 그리스도의 덕이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저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당연히 이 일은 어렵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그리스도는 나를 향해 날마다 매순간 그리 하신다. 절실하다는 것, 인생의 황혼이 깃들면서 저마다 이제 슬슬 어디가 아프고 망가진다. 갑작스런 죽음이 아니면 모두는 늙어가고, 늙음은 병마를 달고 온다. 누구는 허리가 아파 고질적으로 고통당하고, 누군 예사로운 줄 알았던 뱃속의 혹이 심상치가 않다. 누구는 잇몸이 내려앉아 고생이고, 누구는 귀와 눈이 어두워지면서 자꾸 이제, 어디가 아프다. 이러한 인생의 곤경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고 이에 따른 대처는 저마다의 신앙에 달렸다. 언짢아만 할 게 아니라, 주께 피하며 호소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71:1).

 

우리는 이제 안다.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 더 큰 불행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격하고 감사하였던 기억들이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어주는지를,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5).

 

이와 같은 고백이 하나도 없는 영혼은 강퍅하다. 그 삶은 모질고 현실은 잔혹하다. 늘 억울하기만 하다. 누가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다, 이제 좀 살만해지니까… 하는 그 마음의 토로와 억울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번번이 우리 인생이 우리를 속이는 일이 언제 한둘이었던가? 하여 더욱 주를 바란다는 것,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6).

 

이 정도 감격과 믿음의 고백은 있어야 늙음을 맞서면서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늙어가는 일이 슬슬 실감이 나는 나이에,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7-18).

 

이것이 이제 나의 기도이고 우리의 기도이기를 바란다. 환난은 우리로 주의 도움을 절실하게 하고,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들을 더욱 더 선명하게 기억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중언부언 여러 변명과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주께로만 아뢴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4).

 

우리로 환난은 이처럼 값진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는 회개였다. 회개는 주를 더욱 바라며 소망을 갖게 하고 이로써 천국백성으로의 준비를 서둘게 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스스로 자부하고 붙들었던 것은 모두 부질없는 돌과 같으니, 길가의 돌멩이로도 나의 소신은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무엇을까? 첫째, 모든 선을 기뻐하심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둘째,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2).” 곧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남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에게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천대하고 무시하던 막내아들이며 동생이었던 다윗에게로 가족들과 함께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였던 자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곧 환난은 세속적인 우리의 고질병-편견, 아집, 집착, 부정하고 부패한 모든 것들로부터 돌이켜 주 앞에 나아오게 한다. 또한 우리의 환난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 갚아주심을 알게 한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살후 1:6).” 이처럼 환난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안식을 맛보아 알게 한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7).”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고 부흥하였던 때도 공교롭지만 모두가 환난이 극심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와 같은 말씀의 참 뜻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5-26).” 그러므로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이와 같은 신앙의 토대가 환난에서였다. 자연발생적으로는 육신이 나이들고 병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이는 지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러할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공동체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1).

 

오늘 말씀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도엑의 부분을 다루지 않는다. 사울의 발작적인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미루고 있다. 이는 저들도 어쩔 수 없음이고, 이를 묵상하기에는 내가 너무 숨이 가쁘다. 저가 나고, 내가 저들과 다르지 않아서도 말이다. 끊임없는 악의 되풀이는 앞으로도 여전한 이야기다! 지금은 다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누구보다 이를 두루 다 겪었던 지혜자의 결론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성경은 항상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오직 우리의 길은 곧은 길,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하기를, 주의 재림은 첫째, 계시로 우리에게 알리신다는 것.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7).” 둘째, 곧 주의 승천하심과 같이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이는 사건이지 기대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셋째, 하늘에서 오신다.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 넷째,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 다섯째, 불꽃 가운데 오신다. 여섯째, 오심으로 보응하신다. 곧 형벌을 내리시고 안식을 더하실 것이다. 그 구분은 명확하다. 일곱째, 이에 우리는 서로가 같은 처지인 것 같으나 확연히 갈린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8).” 곧 안식에 들어갈 자와 형벌이 임할 자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다. 양과 염소가 나뉘듯이 말이다. 여덟째, 그 보응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9).”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다는 형벌. 다른 하나는 그 힘의 영광이 영원히 단절된다는 형벌. 곧 이 모든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규칙적인 순환을 저들은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이에 오늘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네 번째 시간으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1).

 

곧 우리가 바라고 구하는 오직 한 가지 길, 그 길을 향하는 여정에서 다른 것은 무의미하다.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눈은 저들과 달라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이는 곧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서로가 같은 형편인데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같은 세상인데 다른 형편으로 산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5:1, 2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이는 우리로 환난을 통해 참된 기다림을 알게 하시는 훈련의 과정으로 연마하는 신앙의 결과, 성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2).

 

저와 같은 간절함으로,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이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묵묵히 주만 바라며 나아간다는 것은,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3).

 

오직 주께로 호소하고 주를 기다림으로 새 힘을 얻는 것이 환난이 터득하게 하는 놀라운 역설의 평안이었다. 곧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길은 주의 긍휼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 이 놀라운 고백…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신뢰하겠다는 신앙으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지, 그렇지!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4).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그러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아, 우리가 주목하는 것,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