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9
다윗이 놉으로 도망쳤다.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과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1-6). 그 후 사울의 목자장이었던 도엑을 잠시 언급한다. 저는 곧 엄청난 살생에 앞장서게 될 자이다(7-9).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체하는 광경은 눈물겹다. 쫓기는 자로 광야를 배회하고 어디에 은신하며 산다는 일이 참혹한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 주를 찾는다는 것, ‘제사장들의 성읍’으로 알려진 놉 땅으로 피한 것은 주를 바라고 찾는 길이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여,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게 하십니까?’ 하소연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장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5).
오늘 본문은 저가 처한 상황이 급박하고 안타까운 것이기보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상황은 어렵고 이런저런 일은 여전하지만 주를 신뢰하는 것으로 나의 노래가 되고 구원인 것을 안다는 것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는 어떠하든지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하는 믿음이었다.
날은 흐렸고 바람은 고요하여 나는 가만히 저수지로 나가 앉았다. 낚싯대를 던져놓고 찌 끝을 응시하며 시선을 맞추고 있으면 모든 잡념은 사라진다. 언제부터 찬송을 허밍으로 부르다 시선을 놓고 있는 시간이 좋다. 이런저런 생각이 두서없이 밀려왔다 쓸려가기도 한다. 우리의 죄성과 연약함은 숙명이란 생각도 하였다. 정신없이 도망치듯 낚시에 빠졌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저런 날들을 떠올리면 부끄럽기만 하고 두렵기도 하다.
한데 성경에 이르심과 같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 놀라운, 날 위한 주의 사랑 앞에 나는 저의 위대하고 놀라우신 사랑에 감복한다. 이제는 나의 나 된 것으로 안도와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그런 것을 보면 주의 은혜가 참으로 크시다. 이에 또 한 번 놀란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그러니까 내가 가진 놀라운 능력은 그런 상황-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체까지 해야 하는 지경에서도 주를 찬송하는 일과 같다. 어쩌면 다윗의 도피생활은 저로 예배를 예배답게 만들었다. 이때 블레셋 성읍 가드 왕 앞에서 그러한 행동은 처절하고 비참한 것이나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고 신뢰하게도 한다. 이를 사탄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실제 가드 왕에게로 간 것은 다윗의 내재된 두려움으로였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사울을 피한다는 것이 더 큰 악재를 만든 셈이다. 그러한 다윗의 모습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성경은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음을 알린다. 언제든 저와 같기 때문이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지금은 아니라지만 나에게 낚시란 도망 가 숨는 은신처 같은 구실이었다. 회피의 상징이었다. 낚시, 하면 왠지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스로 문제에 빠졌을 때, 더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찌할 수가 없을 때, 잘해보려 애쓰다가 더더욱 힘에 겨워 숨고 싶을 때, 숨을 쉴 수 없을 때, 나는 며칠씩 혼자 있는 낚시를 선호하였다. 돌이켜 보면 그런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어느 순간도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허밍으로 찬송을 부르다 흘린 눈물이 이상할 때도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다윗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들 안에 두려움이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11).” 곧 그러저러할 때도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알아본다. 곧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은 내가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어려움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두려움이 나로 올무가 되게도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러므로 주만 바란다는 것은 특이하고 기이한 일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곧 두려워할 걸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오늘 사건을 배경으로 다윗이 지은 시는 놀랍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8-9).
어찌 그런 일을 겪고 이와 같은 시와 찬미가 가능할까?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8-19).
어제는 문득 저수지에서, 예전의 나와 오늘의 나를 생각하며 주의 놀라우신 은혜에 흐뭇하였다. 오늘 시편의 내용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 것처럼 시의적절하게 찬미하게 하신다. 주제는 예배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세 번째 시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1).
우리가 주의 집으로 올라간다는 것, 사람의 됨됨이는 여가시간으로 알 수 있고 여유 있을 때 드는 마음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일,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것.’ 곧 오늘 우리의 날들은 순례의 길로 모든 여정을 마치면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으로도 안도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인 성전, 성전이 있는 저 예루살렘, 시온을 그리워하며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복이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 그만두어야 하는 것,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제 나는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오전 내내 물은 잔잔하였고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였다. 가끔씩 눈을 들어 짙게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서러움에 쫓겨 오듯 하였던 시절을 생각하였을까? 이제 나로 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선하게 하심이 기이할 정도로 감사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2).
이와 같은 마음이 곧 예배이다. 예배가 된다. 주를 바라고 주를 찬송함이다. 오늘 시인은,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2-3).
하고 의인화하여 고백을 한다. 잘 짜여진, 조밀하다는 것은 결합을 의미한다.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었다. 그게 어디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사탄은 이를 두려워한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개개인의 나를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 내 안에 두시는 어떤 마음, 누구의 어려운 처지와 저가 당하는 고통, 멀리 이방의 땅에서 주의 복음을 실천하고 있는 아이, 홀로 괴로움에 신음하는 어떤 어미의 심정, 어떤 이의 우울증과 저가 겪는 공포증에까지… 이래저저래 알게 하신 이들을 내 안 가득 담아서 주께 올려드리는 것.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며 한가로운 것 같이 굴지만 그 모든 게 실은 저들, 우리를 두고 주께 아뢰는 시간이 되어주고 있었으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곧 우리가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데 있어 예배로의 삶이란,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8-19).” 우리로 여러 잡념과 허다한 일에 시달리며 살게 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람이란 귀하였고 내밀하게 주를 의지하는 일이었다. 곧 우리로 그 하루가, 예배가 예배다울 수 있게 하는 것이 감사였다. 가만히 찌를 응시하고 있으면서 결국은 나의 오늘 나 된 것이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오늘 시인도,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122:4).
감사하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앞에 앉는 것. 성경은 여느 인물치고 이와 같지 않은 이가 또 있을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저는 어찌 그런 상황에서 찬송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당장 사자굴에 던져질 상황에서 어찌 저는 ‘하던 대로’ 감사를 할 수 있었을까?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감옥에 갇혀서도 어찌 찬송을…. 아삽이 이를 종합한듯 시로 찬미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50:23).
놀랍다는 것, 남의 이런저런 일에 그럴 수 있으나 나의 나 된 것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복되었다. 곧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어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100:4-5).
이와 같은 말씀과 찬송과 경배가 내 것이 되었다는 데서 다른 무엇이 더 귀할 수 있겠나?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그에 따른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5).
우리가 곧 도래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서 평안을 얻고 기거함이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움과 슬픔뿐이라, 때론 그와 같은 내용을 구술하고 한동안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그런 중에도 희미하나 그때마다 주가 함께 하셨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찬송할 것뿐이다. 마치 색 바랜 사진을 보다 저만치, 희미하지만 분명한… 주가 함께 하셨음을 확인할 때의 어떤 놀라움.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곧 나로 주의 상전을 삼으시기까지 주는 한 번도 나를 떠나신 적이 없었다. 하여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6-7).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서러움과 억울함을 사이에 두고 주의 평안이 늘 함께 하셨다는 것에 새삼 내가 잃어버린 감사와 찬송을 통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를 기뻐하였다는데,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되물으면 그것이 되레 무색할 정도로 어렴풋이나마 나의 감사가 때론 생소하기도 하다. 그럴 상황도 건강도 여러 마음의 무게도 말이 아닌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주를 찬미하는 것.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이는 한없는 주의 은혜를 아는 자의 것이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8).
부디 내 곁의 누구누구에게 나로 인해 주의 살아계심을 알려지고 나타나기를. 이를 위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부디 그러하기를.
월요일, 날은 흐리고 금세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이 흐렸으나 바람 한 점 없는 저수지에서 나는 그와 같은 고요를 사랑하였다. 주가 더하시는 평안을 맛보아 알 수 있었다. 자주 나올 수는 없지만, 전에처럼 도망치듯 숨으러 오지는 않는다. 그러는 중에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두고 주와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마음을 쓰다가 주여! 하고 부를 때… 예배이었다. 주의 성전으로 향하는 여정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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