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전봉석 2022. 8. 8. 05: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왕하 13:20-21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북이스라엘 여호아하스(B. C. 814-798)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다스렸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 3세의 지배를 받는다. 결국 여호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12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다(1-9). 요아스가 아람 징벌에 대한 예언을 들으며 16년간(B. C. 978-782) 북이스라엘을 통치한다(10-19). 이어 엘리사는 죽어 장사되고, 그는 죽어서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모압 도둑 떼를 죽여 엘리사의 무덤에 던졌을 때 엘리사의 뼈와 닿으면서 회생하여 도망하는 사건도 기록되었다(20-21). 앞서 여호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학대하나 말씀대로 요아스가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빼앗겼던 성읍을 도로 회복하는 내용도 볼 수 있다(22-25).

 

이어지는 왕들의 허물과 죄악이 마치 신앙의 거울처럼 대를 지어 전개됨을 본다. 곧 아비의 죄가 아들에게 이어지는 것은 죄의 계통적 발생으로 서로에게 유전되는 것을 명심하게 한다.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렘 9:14).” 이는 결국 주의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 열조를 따라가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암 2:4).” 하여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일러 상대적으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신앙도 불신앙도 그 부모의 모습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모를까, 의도된 죄악은 유전처럼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이 악의 굴레를 끊을 수 없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3-5).

 

곧 우리의 복은 주를 경외함으로 이생도 내생도 산다. 하여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 4:14-15).” 이를 일깨우고 돌이키는 데 고난은 필수다.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바울은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곧 오늘의 어떤 어려움을 무조건 회피하고 무색하게 벗어나려고만 할 게 아니다. 그 원인에는 죄가 있고 그 결과에는 주의 은총이 있다.

 

가령 의인이 죽음까지도 헛되지 않음을 오늘 본문의 기이한 사건, 엘리사가 죽어 장사되고 난 뒤 그 무덤에 던져진 도적 떼의 시체도 소생하여 다시 살아난다. 이는 주를 경외하고 복 있는 자의 죽음은 죽어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의 흘러넘침’과 같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젊은 나이에 죽은 윌리엄 쿠퍼나 심지어 5년의 짧은 선교 사역을 다하다 폐렴으로 죽은 브레이너드의 일생을 보면, 참 안 됐고 안타깝기까지 하나 헛되지는 않다. 쿠퍼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저로 찬송시를 짓는 원동력이 되게 하셨고, 브레이너드는 그의 일기가 후대에 알려지면서 당시 국교회 목사를 선호하던 수많은 목사 지망생들을 선교사의 사역으로 이끄르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성경의 세례요한의 죽음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던 그의 업적은 무색하게 헤롯의 흥을 돋우는 데 죽음으로 생을 마치지만, 예수님은 일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하시며 저를 높이셨다. 하여 우리는,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4-5).

 

곧 하나님을 사랑하면 악을 멀리하게 되고, 죄의 심각성을 알고 주 앞에 몸부림치는 삶으로 이어진다. 이때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변호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1-2).

 

이는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하는 기도로 이어진다. 저만이 우릴 도울 자이시다.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욥 30:13).” 그러나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21).” 주가 나를 방어하신다. 나아가 보복하신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렘 11:20).” 이는 마치 누적되는 경험과 같이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20:12).”

 

매번 느끼지만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징계도 따른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 11: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복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이러한 마음을 잃어 굳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에 따른 최후는 이어지는 역대 왕들의 역사를 보면서 알게 된다. 우리 조상의 일들에서도 그 사실은 입증이 된다. 이를 깊이 알 때 자신의 대에서 돌이킬 수 있다. 죄의 굴레를 벗고 주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죄를 뉘우쳐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8-9).” 나는 시간 있을 때마다 안 믿는 가족들을 두고 기도하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혼자 믿음을 지키며 한 시간 반 또는 같은 인천인데도 서너 번을 갈아타고 한 시간 가까이 걸려 예배로 오는 아이들의 걸음을 축복한다. 주께서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7-9).

 

어제도 같이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우리가 다 아는 누구를 들어 말해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오고 주를 따른다 하여 서로가 위하고 기도하며, 저의 길이 순탄하였다. 원하는 대학과 고시를 치러 한국은행에 입사도 하였다. 한데 저의 믿음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안 믿는 여성을 만나면서 저와 결혼까지 이뤄 결국은 그 신앙이 물거품이 된 듯 무너져버렸다. 이런 말을 한 것은 같이 식사하면서 이번에 사귀었던 누구와 헤어졌다는 말에 꺼낸 이야기였다. 물론 주의 은혜로 저를 돌이켜 주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수도 있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은 죄를 더 따르게 되어 있다.

 

각 시대마다 그러했고 특히 왕들의 기록으로 미뤄 저들의 생이 이를 반증한다. 모든 축복의 상징이랄 수 있는 솔로몬도 기어이 안 믿는 처첩들의 문화와 우상으로 결탁하여 노년에는 주의 뜻을 저버리는 길로 갔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남북이 갈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때마다 주는 함께 하셨으니 주의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어렵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삿 2:18-19).” 역사의 수레는 오늘도 다르지 않다.

 

나는 아이 곁에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부디 주를 경외함을 잃지 않기를. 이를 위한 우선이 늘 근신함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하기를 당부하였다. 남자는 세 번 위기를 겪는데 군대 갈 때, 사랑할 때, 직장을 얻어 가정을 이룰 때이다. 특히 그때마다 상황은 교묘하게 주와 멀어지게 한다. 여자 또한 다를 게 없는데 대학 가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을 때이다. 특히 상대가 안 믿는 자이면 그 믿음을 잃기 십상이다.

 

마치 믿음을 무슨 낙인이나 문신처럼 한 번 고백하면 영원한 줄 아는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는 말씀이 성경의 기본인데, 결국 그 믿음은 행함으로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진짜인지 자짜인지 사는 동안 누가 어떻게 확신하고 살겠나? 타종교인들도 그 믿음 하나는 자폭까지도 서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린 대체 왜 이 모양일까? 결국은 죄성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하여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 3:11).” 결국 죄성으로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다. 그 형편은 숱한 왕들의 결국을 보면서 절실하게 배운다.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 누워있던 자를 고치시고, 후에 이르시기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4).” 결국 고난은 죄를 돌아보게 하고, 죄는 고난을 끌어들인다. 하여 더욱 두려운 말씀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행여 더는 돌이킬 수 없이 굳어진 마음으로 살까 하여,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어제 오후는 종종 마음이 어지럽고 조금만 건드려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날에 통영으로 내려간 친구를 생각하면 그렇고, 여전히 주저하며 자신에게 맡기신 이 귀한 사역을 미적거리며 뭉개고 있는 친구를 보면 그러하다. 또 누구는, 지금 닥친 대인공포증으로 주의 길을 간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인데, 이를 계속 가라 할지 말라 할지, 나는 그저 한 발씩 앞으로 할 수 있는 만큼씩으로 은혜가 있음을 저에게 어찌 알게 할까, 하고. 아,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 주 앞에 묵묵부답 입을 꾹, 다물고 골난 사람처럼 있으려니까 내 속만 더 죽겠다. 그야말로 나도 내 코가 석 자인데.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41:1).

 

이는 주를 경외하는 것으로,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세 번씩이나 이를 요구하시는 주의 뜻을 알 것 같다. 어느 훗날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당장 자신도 돌보기 어려워 거의 은둔에 가까운 삶으로 특히 누구는 거기에 또 게으름과 식탐을 더해 자신을 방치하듯 내버려두고 있으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이 모든 게 다 끝이 있다. 언젠가 우린 주 앞에 서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나는 그래서 누가 눈물을 흘리며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같이 자꾸 마음이 어렵다. 또 누가 전혀  다른 길로 갈 때 나는 더욱 두렵다. 이는 내 마음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저가 그러든가 말든가, 예전엔 누가 나더러 참 차갑다고 할 정도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부디 우리의 승리는 주를 신뢰하는 데 있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3).” 나는 감히 내가 목사인 것도 드러내기 부끄러우나 그저 한 발, 오늘도 이 하루를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누구에게는 같은 환자로, 우리의 죄인됨을 주께 고하며 부디 귀히 쓰심을 두고 주를 송축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2).

 

곧,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9).

 

이와 같은 인생에서 누구를 의지할까?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0-11).

 

이런저런 상황,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 무자비한 상황 가운데서도 무던히 주만 바라는 일. 하면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나의 고질적인 문제도 병약함도 가난도 그 어떤 어려움도 결국은 나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부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때론 나의 몸, 나의 망설임, 나의 주저함이 나의 원수라고 고백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100:4-5).

 

우리에게 두신 이 분명한 주의 언약이 있다. 다른 증표는 의미도 없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145:1-2).

 

그리하여 부디 나의 가는 길이,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12-13). 아멘.